이승만의 유럽 방문지 (4) -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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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g Zy – 파리를 상징하는 세느 강과 에펠탑의 어울린 멋진 풍경
Paris (파리) – 파리평화회의(1919년) 개최지
2월24일의 국제연맹총회에서 19인위원회 보고서가 채택되자 일본정부는 이튿날로 「진정서」를 발표했다. 만주를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놀라운 세력으로 침투되고 있는 극동의 공산주의의 위험에 대한 장벽을 구축하는 것이라면서 연맹의 태도변경을 촉구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파리의 1차 방문은 3월5일에 李承晩은 파리(Paris)로 갔다. 李承晩은 서영해와 함께 주로 전차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부아 드 블로뉴](Bois de Boulgogne)숲도 걸었다. 그러나 李承晩이 파리로 간 목적은 영어로 된 「Lytton Report」를 입수하여 자기가 쓴 [만주에 있는 한국인」이라는 글과 함께 파리에서 발행하는 일 때문이었다.
영어로 된 [Lytton Report]를 입수하지 못하자 李承晩은 바로 제네바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입수해가지고 서영해에게 부치기로 했다.
李承晩은 파리에 있는 동안 Honolulu/호놀룰루에서 보낸 반가운 전보를 받았다. 제네바에서 전송된 것이었는데, 내용은 앞으로 1년 동안 李承晩이 제네바에서 더 머무는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3월9일에 제네바로 돌아왔다.
李承晩의 집념의 산물인 「만주에 있는 한국인」(The Koreans in Manchuria ― Extracts from the Lytton Report with Comments by Dr. Syngman Rhee)이라는 팸플릿은 파리의 한국통신사 (Agence Korean)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모두 35면인 이 팸플릿의 목차를 보면, 「글쓴이의 목적, 현 사태의 원인, 한국문제와 만주문제의 불가분성, 만주의 한국인 인구, 초기 이주자들, 근래의 대량 이주의 원인, 쌀 재배,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증오감,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 충돌의 시작, 일본을 유화하려는 중국(한국인 탄압과 한국인 귀화정책), 조약상의 권리, 이중국적, 萬寶山事件, 韓-中 友好, 일본에 불가결한 만주, 일본의 보호, 러시아에 있는 한국인, 한국의 민족주의, 人道를 위한 호소, 부록: 일본인들의 잔학행위, 渾春(훈춘)사건, 도쿄 대학살」 등으로 되어 있다. 「리턴보고서」를 적절히 인용하면서 만주에 있는 한국인의 곤경과 일본인의 비인도적 행위를 고발하고 한국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것은 李承晩이 독립운동 기간에 집필한 여러 논설 가운데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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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마침내 3월27일에 기정방침에 따라 국제연맹에 대해 정식으로 탈퇴를 통고했다.
국제연맹은 「리턴보고서」를 채택함으로써 일본을 국제연맹으로부터 탈퇴시키기는 했으나, 일본의 침략행위를 제재하는 효과적인 조치는 아무 것도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는 스스로 국제적 고립화의 길로 들어선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李承晩이 희망적으로 예측했던 美-日의 衝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선택 이었다.
(c) Wikipedia Pic. - 파리의 서쪽에 위치하는 [Boulogne 숲]의 웅장한 풍경
주: Bois de Boulogne (Boulogne의 숲)은 파리 16 구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대형 공공 공원이다. 이 땅은 1852 년 나폴레옹 3 세 황제에 의해 파리 시에 양도되어 공공 공원으로 바뀌었다. 파리에서 두 번째로 큰 공원으로 도시 동쪽에 있는 [뱅센 숲] (Bois de Vincennes)보다 약간 작다. 면적은 845헥타르로 뉴욕 Central Park 면적의 약 2배 반이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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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의 파리 2차 방문은 5월21일 오후 2시4분에 밀라노-파리간 급행열차의 3등칸을 타고 몽트뢰를 출발하여 밤 11시10분에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5월23일에 소련공사관을 찾아가서 제네바에서 보낸 추천서가 와 있는지 물었다. 추천서는 와 있지 않았다. 李承晩은 胡世澤에게 전보를 치고 편지를 두 번이나 했으나 5월30일까지 회담이 없었다. 그는 베르사유에도 다녀오고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파리박람회, 중국미술전람회 등을 구경하고, 국제 테니스시합도 관람하면서 소식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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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면적은 약55만km2이고 인구는 약 6’100만 명의 나라로 유럽에서 큰 나라이다. 지리로는 독일, 이탈리아 등 8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영국과는 해협을 끼고 마주 보는 유럽의 중심국이다. 오래 전에 현재의 국도가 정해지고 유럽 세력 다툼의 무대로 숱한 정쟁을 치르었다. 대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세운 프랑스는 혁명과 사상 외에 예술과 패션의 세계적 중심지, 해마다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유럽최대의 관광국 중 하나이기도 하다. / www.france-voyage.com/en
(c) Wikipedia Pic. - 유명한 조약들이 체결된 [Versailles 궁전]의 멋진 풍경
베르샤유 궁전 : The Palace of Versailles (French: Château de Versailles)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19km 떨어진 베르사유에 위치한 루이 14 세 왕이 지은 전 왕실 거주지이다. 궁전은 프랑스 공화국이 소유하고 있으며 1995 년부터 프랑스 문화부의 지시에 따라 베르사유 궁전, 박물관 및 국립 재산의 공공 설립에 의해 관리되었다. 매년 약 천500만명의 방문객이 이 궁전, 공원 또는 정원을 방문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Louis XIII는 1623 년 베르사유 궁전 부지에 간단한 사냥 롯지를 짓고 1631-34 년에 작은 성으로 대체했다. Louis XIV는 1661 년부터 1715 년까지 여러 단계에 걸쳐 성을 궁전으로 확장했다. 그것은 두 왕이 가장 좋아하는 거주지였으며 1682 년 루이 14 세는 그의 궁정과 정부의 자리를 베르사유로 옮겨 궁전을 사실상 프랑스의 수도로 만들었다. 이 상태는 주로 궁전을 내부로 변경 한 Louis XV와 Louis XVI 왕에 의해 계속되었지만 1789 년 왕실과 프랑스 수도가 파리로 돌아 왔다. 프랑스 혁명의 나머지 기간 동안 베르사유 궁전은 대부분 버려지고 내용물이 비워졌으며 주변 도시의 인구는 급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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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프: Musée du Louvre)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박물관이자 프랑스 파리의 역사적인 랜드 마크이다.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를 포함한 가장 잘 알려진 예술 작품의 고향이다. 도시의 중심 랜드 마크로 도시의 1 구 (지구 또는 구)의 센 강 오른쪽 은행에 위치하고 있다. 주어진 시점에서 선사 시대부터 21 세기까지 약 38,000 개의 작품들이 72,735 km2의 면적에 걸쳐 전시되고 있다. 2022년 방문객은 780만 명으로 2021년보다 170% 증가했지만 여전히 COVID 이전 2018년의 1,080만 명보다 낮다. / / www.louvr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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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런던)
(c) Wikipedia Pic. - 런던의 상징인 [Westminster]와 주위의 현재 풍경
李承晩은 6월11일에 런던(London)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는 이튿날부터 세계경제회의 (The World Monetary and Economic Conference)가 열렸다. 국제협력에 의하여 세계의 불황을 일거에 타개할 것을 목표로 미국과 소련 등 국제연맹의 비회원국까지 포함하여 64개국 대표 168명이 참가한 대규모 회의였다. 중국에서는 駐英공사 郭泰祺는 물론 駐소련대사 顔惠慶과 행정원 부원장 宋子文(T. V. Soong)도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척 바빴다.
李承晩은 영국 국왕과 수상의 연설을 라디오로 들었다. 두 사람의 연설을 들으면서 유럽에는 일본에 대항할 나라가 없고, 언젠가 일본에 도전할 나라는 오직 미국뿐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李承晩은 6월14일에 영국의회의 한국 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의장이었던 귀족원 의원 맘헤드(Mamhead) 경을 예방하여 극동정세에 대한 의견교환을 하고, 이튿날 저녁에는 [The Times]지의 편집인 그레이(Grey)를 만났다.
李承晩은 6월14일에 하와이로 전보를 쳐서 내주에 파리로 돌아간다고 알리고, 6월16일에는 자기가 런던에 온 것은 중국 駐소련대사 顔惠慶 박사를 만나 볼 필요가 있고, 영국의회 안의 [한국친우회] 회원들이 지금은 활동할 시기가 되었으므로 영국을 다녀가라는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는 편지를 써 보냈다.
사실 李承晩이 런던에 간 주된 목적은 중국공사관에 소련 비자 교섭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郭泰祺는 소련공사와 좀처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6월23일에 파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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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4일에 李承晩은 파리의 소련공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소련공사관 문은 닫혀 있었다. 토요일이었던 것이다. 월요일에도 소련공사관 문은 닫혀 있었다. 월요일은 휴무라는 안내문이 나붙어 있었다. 화요일인 6월27일에 안토노프 총영사는 모스크바로부터 회답이 왔다면서 李承晩에게 입국 비자를 내어주었다.
李承晩은 그 길로 체코슬로바키아영사관으로 갔다. 체코슬로바키아영사관은 폴란드 비자를 먼저 받아 오라고 했다. 폴란드 비자를 받아가지고 다시 가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랜지트 비자를 받았다.
이튿날 李承晩은 다시 소련공사관에 가서 이한호의 입국허가가 나는 대로 취리히로 보내 달라면서 이한호의 여권을 맡겼다. 그러고 나서 영사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스크바의 정부 당국자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영사는 본국정부는 이미 李承晩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래서 외무인민위원회는 어려운 비자를 내주도록 자기에게 명령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외무인민위원회에 알리면 그들은 기꺼이 李承晩을 만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이한호의 비자에 대한 통보가 올 때까지 제네바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6월29일에 파리를 떠나 제네바(오텔 드 뤼시)에 도착했다. 이튿날 그는 하와이로 타전하여 비자가 나왔다면서 여비를 부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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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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