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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g Ziyul – [Prestige Continental Express] 차량의 식당차 외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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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lman Club AG고급기차전문여행사

 

이 여행사는 기차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인데 두 사람의 합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라트 (Alby Glatt) 사장은 취리히 소재 여행사 [Intra Avion AG]의 공동 소유자이며 Intraflug AG Zuerich [노스탈쥬 이스탄불 오리엔트-익스프레스] (Nostalgie Istanbul Orient-Express)의 1976 – 1992년간 운영한 즉 여행분야에 35년 이상 경혐한 여행 전문가이다   

 

정열적인 철도애호가로서 글라트 (Alby Glatt) 사장은 유럽 호화열차 르네쌍스의 설립자이고 또한 [독일 쾰른 소재 라이골트 샤롱열차 ]사의 중역의 일원이다. 또한 그는 1931년에 수선한  [글라씨어 익스프레스] (Glacier Express)의 [풀만객차] (Pullmanwagen) 의 래티철도 (Rhaetische Bahn)의 샤롱열차(Salonwagen)  협회의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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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ss Travel System – 조밀한 노선망과 정확하게 운행되는 [스위스연방철도]의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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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issTravel System편리하고유익한교통시스템

[Swiss Travel System]은 총 연장 26’000km에 달하는 스위스의 철도망은 세계적인 수준으로서 안락함과 경제성에 있어서 탁월함을 자랑하고 있다.  철도노선이 거미줄 같이 퍼져 있어서 스위스 내의 모든 관광지와 직접 연결되며 동시에 유럽 각 지역으로부터의 진입구에 해당되는 주요 공항 및 특급열차의 정차 역에서 쉽게 갈아 탈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 여행의 편리함을 더 하기 위해서 국토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우편버스 (Postauto) 노선들과 케이블 등의 제반 교통 시설이 적재적소에 구비되어 철도망을 보완해 주고 있다. 조밀한 대중교통 네트워크는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여행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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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g Ziyul - [제1회 눈관광 전시회]의 개막식에서 환영인사를 하는 슈미트 (J. Schmid) 관광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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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Moritz - 1회 스위스 눈 여행전시회 (STMS) –

[제1회 스위스 눈 여행전시회]가 [동계올림픽 개최지]였던 쌍트 모릿츠 (St. Moritz) 에서 2014년3월12일부터 15일까지 개최되었다. 40여개국에서 초청된 200명의 바이어와 업체의 전시자가 100여명 그리고 몇 명의 기자들이 참석하였다.  금년은 스위스의 눈 즉 겨울 여행 관광이 시작한 150주년을 기념해서 [스위스 관광청 (Switzerland Tourism)]과 스위스 동부 지방 [엔가딘 (Engadin) - 쌍트 모릿츠 (St. Moritz) 관광국]의  주관 하에  3월12일 저녁 6시에 쌍트 모릿츠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Kulm Hotel에서 개회식이 있었다.  슈미트 (Juerg Schmid) 스위스 관광국장의 환영인사에 이어서 관계자들의 설명 및 환영인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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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3일과 14일 양일 간은 [Corviglia Tennis Center]에서 워크숍을 갖고 열심히 상담이 전개되었다.  폐회식은 3월15일 저녁 6시부터 Suvreta House 호텔에서 있었다. 초청된 바이어 들은 아시아에서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에서, 유럽에서는 영국, 러시아와 동구 여러 나라 그리고 카나다 등 새로운 관광 시장에 비중을 두고 초청이 되였다.

전시자들은 스위스 전역의 겨울관광지에서 특히 엔가딘 지방과 그라우뷘덴 주에서 많이 참가하였다. 이 행사에 참석자들은 쌍트 모릿츠와 근처의 20개 이상의 호텔에 분산하여 투숙을 하였다.

www.engadin.stmoritz.ch/winter/en/activities/scintillating-st-moritz/150-years-of-winter-tourism.

 

 ©Song Ziyul - 초청된 바이어들이 이용한 한 호텔의 풍경 [Hotel Kempi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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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트 모릿츠 호수 (St. Moritzersee)

인 (Inn) 강 연안에 쌍트 모릿츠 호 (St. Moritzersee, 1770m)의 호반에 위치한다. 여름에는 하이킹, 겨울에는 겨울스포츠가 성하며, 가까이에 광천이 분츨하고 있기에 연간을 통해 많은 래저 객과 보양 객(保養客)들이 모인다.  이탈리아 국경에 가깝고, 국경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15km정도 (그러나 산악지대를 격리되어 실지적 거리는 멀다)이다. 가까이의 도시로서는 약 45km 북서에 쿠어 (Chur)가 위치하고 있다.   

 

쌍트 모릿츠는 스키를 시작으로 하는 겨울츠포츠의 멕카로 여러 가지 눈과 어름에 관한  것 그리고 여름 관광 시즌에는 하이킹, 싸이크링, 승마 등을 즐길 수 있다. 글라시어 익스프레스 (빙하특급)와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등 인기의 절경의 철도 여행 루트의 발착지로 되어있다.

쌍트 모릿츠 마을에는 유명 브란드 상점이 나란히 서있는 도르프(Dorf)지구와 스파 시설이 있는 바트(Bad)지구로 나누어저 있다. 쌍트 모릿츠에 있는 있는 [세간티니미술관] 에는 알프스 자연과 사람들을 묘사한 화가 죠바니 세간티니 (Giovanni Segantini, 1858-1899)의 작품을 수집되여있다. 3부작 [생성 (生)], [존재 (自然)], [소멸 (死)]도 전시된다. 석조의 돔형의 건물은 특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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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가딘 (Engadin)

마로야 (Malogla) 패스의 산들을 원류(源流)로 만들어진 물이 북쪽으로 흘러 오스트리아 국경을 지 나, 짧게는 다뉴브 강에 합류 하는 강 Inn (로망슈어로 엔 강 En). 그 강을 따라 뻗는 다 산 사이 긴 골짜기는 로망슈어 "인 강 정원"를 의미 하는 「엥가딘/Engadin」 이라는 이름으로 사랑 받고 있습니다. 스위스 제 4 국어 인 희귀 언어 "로로"를 말하는 지역이다. 체르네츠(Zernez) 부근을 경계로, 강의 상류에 해당 하는 남쪽으로 독일어에서  오버엥가딘 (Oberengadin, 로망슈어: Engiadin'Ota), 강 하류에 해당 하는 북쪽으로 독일어에서 운터엥가 딘 (Unterengadin, 로망슈어: Engiadina) 라고 한다. 기원전부터 오래 된 역사와 독특한 문화를 계승 하며, 두꺼운 벽에 작은 창 공연 라 맞춤기법으로 그려진 기하학 무늬와  프레스코 물감으로 벽을 장식한 아름 다운 집들이 특징.   알프스의 산들,  아름 다운 강과 호수 등 장엄한 대자연에 둘러싸인 담길 귀여운 마을 곳곳에 있다. 유명한 알파인 리조트로 알려진모리츠 (St. Moritz)를 중심으로 하는 오버엔가딘에는, 웅대한 빙하와 4000m 급의 베르니나(Bernina) 알프스의 산들, 넓은 골짜기 바닥의 평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호수가 만들어내는 절경 인상적. 일년 내내 다양 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인기 지역 이다. 옛 부터 효능이 알려져 왔다. 스퍼 리조트로 알려져 있는 스콜 (Scoul)를 중심으로 한 운터엔가딘 지방 비는 전체의 밸리 충실 때문에 산의 사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 소박한 산촌 (山村)의 분위기가 남아 있다.

Tourismusorganisation Engadin St. Moritz / www.engadin.stmoritz.ch/150jah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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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Ziyul - 바이어 들에게 홍보 판촉하는 전시장의 상담 풍경 

 

더 구체적인 “겨울관광 150주년”에 관한 영문 텍스트를 첨가해서 게재한다

(출처: 스위스 관광청 / Switzerland Tourism). 

"150 Years of Winter Tourism" - at a glance

From December 2014 to March 2015 St. Moritz, the Engadin and Switzerland are celebrating 150 years of winter tourism. Switzerland Tourism has made the anniversary celebrations marking  "150 Years of Winter Tourism" the main theme of its Winter 2014/2015 campa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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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all began with a wager

Legend has it that winter tourism was born in St. Moritz in 1864:

"Summer tourism was already in full swing when, in autumn 1864, the Engadin hotelier

Johannes Badrutt made a bet with four English guests that, even in winter, they would be able to enjoy the mild Engadin sunshine in their shirt sleeves, sitting on his hotel terrace. lf not, he pledged to cover their travel costs. And if winter in St. Moritz did appeal to them, he would invite them to be his guests and stay for as long as they wanted.

The only winter weather the Englishmen were familiar with was England's cold and damp winters, so even with the best will in the world they could not imagine that it could be any different  in the Swiss Alps. Nonetheless they turned up in the Upper Engadin in time for the Christmas season - and stayed right through until after Easter, leaving nicely tanned, rested and happy. They became the first winter tourists of the Alps and discovered a new world: winter holidays in the snow. And winter tourism in the Alps was here to stay."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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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 Events

Snow Travel Mart Switzerland

Together with Switzerland Tourism, the Engadin St. Moritz Tourism Organisation is planning to showcase the anniversary year to around 300 travel industry experts from more than 40 countries at the 1st Snow Travel Mart Switzerland 2014 (STMS). The STMS is being held in St. Moritz from 12 - 15 March 2014 and is an industry fair designed to market Swiss winter tourism on the international stage.

Opening of the OVAVERVA

The theme of the anniversary year is also to be showcased at the official opening of the

OVAVERVA Pool, Spa and Sports Centre on 5 July 2014.

Twin towns and sister cities

Various exchanges are planned with the cities of Vail (USA), Bariloche (Argentina) and

Kutchan (Japan). The House of Switzerland at the 2015 World Ski Championships in Vail

Beaver Creek for instance will be dedicated to the anniversary year.

Learning all about the history of tourism

The syllabus of the Higher Vocational School for Tourism (HFT) in Samedan includes modules on the tourist history of the Upper Engadin for primary and upper secondary classes. The aim is to give students an understanding of tourism and to raise their awareness of this important mainstay for the Upper Engadin.

Anniversary kick-off

The national inauguration event featuring various snowsports activities is to be held in

St. Moritz on the last weekend in November or the first weekend in December. The event will be based on the traditional "Snowsports Opening" and the "City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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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Facebook (Ziyul Song) / www.facebook.com/ziyul.song

Facebook  (Eurasiatour) / www.facebook.com/pages/EurasiatourInfo/12294439115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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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ätische Bahn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스릴있는 철도교량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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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티슈철도  (Rhaetische Bahn) – 스위스최대의사철

래티슈철도  (Rhaetische Bahn)는 스위스 동부의 [그라우뷘덴/Graubuenden] 주를 중심으로 약 400km의 노선 망을 갖는 스위스 최대급의 사철이다. 연선 (沿線)에는 쌍트 모릿츠 및 다보스 등 세계적인 리조트 지를 갖는 빙하급행 및 베르니나 급행 (BerninaExpress) 이란 정기 열차들이 달리는 관광노선인에 지역의 생활노선으로 여객 및 화물 수송과 함께 다수의 열차를 운행하는 그라우뷘덴 주의 철도 수송을 담당하는 주의 경제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알브라 노선의 일부로 베르니나 래티슈 철도 - 알브라 철도-베르니나 철도선과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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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gleBilder - [취리히대학교]의 본관의 아름다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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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호 (Hanho Rhi, 李漢浩, 1895 ~1960) - 국제스포츠 외교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스위스 취리히에 유학 차 옮겨와서 1960년 별세하기까지 활동한 “Koreaner” (독: 한국인, 당시 조선인 혹은 고려인으로도 표현)으로 유럽 특히 스위스에서 국제 스포츠인 [유도]를 보급에 선구자의 역할을 한 자랑스런 인물이다. 유럽에 오기 전에 조국과 중국에서  애국 운동을 한 분으로도 알려 지고 있다.  더욱 2018년초에 강원도 평창에서 [동계올림픽대회]가 개최될 예정인데 이로부터 70년 전인 1948년에 즉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처음으로 열린 국제 스포츠 이벤트인 1948년초에 스위스 쌍트 모릿츠 (St. Moritz)에서 개최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회]에 태극기를 들고 처음 입장한 선수단의 단장으로 수행한 인물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  

이 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3편으로 나누어서 자료들을 모아 보았다. 

자료는 여러 면에서 수집 하여  인용하고  있으나  일부는 확인하여 수정 및 보충을 하였으나  오래된 일로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1편 국내에서 배움, 중국에서 독립 활동

1장  한국에서 배움

2장  중국에서 독립 활동

 

2편 스위스에 유도 도입 및 보급

1장  일제 강점기에 유럽에 유학생들

2장  스위스와 인접 나라에 유도 보급

3장  1933년 이승만박사를 스위스 취리히와 근처 안내

 

3편 기타 활동

1장  1948년 St. Moritz에서 개최된 [동계올림픽대회]에 한국팀 단장으로 인솔

2장  1954 – 56년 서독에 초대총영사로 임명 되여 활동함

3장  유도 유단자로 유럽 여러 나라에 국제시합으로 국위를 선양

 

부록: 평창올림픽대회에 개최될 경기종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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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ng Ziyul  –  경신고등학교 교사와 창립자 언더우드의 현재의 모습 (서울 혜화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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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받고 활동 

국내에서 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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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박사에 대한 국내의 간단한 약력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아래와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한호 ( 李漢浩)

분야: 예술·체육/체육 

성격: 체육인|체육외교인

출신지: 함경남도 원산 

생년: 1895년 /  몰년: 1960년

대표관직(경력): 경제사절 단장

스웨덴유도유단자 회장 (스웨덴은 스위스일 것임)

 

[내용]

1895(고종 32)∼1960. 함경남도 원산 출생. 경신(擏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스위스의 취리히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평소 신체건강과 호신의 목적으로 유도기술을 습득하여 취리히대학에서 유도클럽을 조직하여 기술지도와 유도인 양성 등으로 유도보급을 시작하였다.

그 뒤 오스트리아·프랑스·네덜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유도를 지도하여 체육을 통한 우리나라의 국위선양에 힘썼다. 광복 후 초대 서독총영사를 거쳐 경제사절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5년 7월 스웨덴유도유단자회장을 역임할 때 우리나라의 유도발전을 위하여 최초로 해외원정경기를 주선하였다.

구체적 활동으로는 대한경찰상무회의 원조로 약 3개월간 스웨덴·오스트리아·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서독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국제시합 및 순회지도로 한국유도를 서구에 소개하고 국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1957년 4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서독에 건너가 본에서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체육회50년』(대한체육회, 1970)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447&cid=46667&categoryId=4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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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Wikipedia에 건급한 자료

호판 이한호 (1895년 생 – 1960918일 샤프하우센 사망)

이한호는 한국의 사업가 및 스위스에 유도의 선구자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조카이다. 이한호는 1925년에 취리히 ETH (ETH Zuerich, 스위스 연방공대)에서 공부하고 여기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에 이한호는 스위스에서 처음 유도를 가르쳤고, 따라서 이 무술을 스위스에 가져왔다.  1929년에 스위스 취리히 (Zuerich) 에서 첫 유도학교/도장 [Judo Sport Klub Zuerich]을 세웠다. 그 후 1936/37년에는 [스위스 유도협회]의 창설에 관여했으며 회장이 되었다. 이 회장직은 1940년까지 활동했다. 1948년6월에는 [오스트리아 아마추어 유도협회]의 첫 여름학교를 [스위스 연방 스포츠학교]에서 이끌었다. 이한호는 유도에서 7단(Dan)의 대가 급에 도달했다.  즉 1953 대한 유도회로부터 7단을 받았다.

이한호는 스위스 아펜쩰 (Appenzell) 에서 향수자료 생산자로 활동하고 있을 때, 1954년에 서독 (독일 연방공화국)의 수도 본 (Bonn) 주재 대한민국의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총영사관을 위해서 그의 사택을 레마겐 (Remagen) 에 소재하는 건물 [Haus auf Leims] 를 총영사관으로 본국정부의 알리지 않고 임대했다. 서독정부로 부터는  [대한민국의 무역대표부]로 인정을 받고 외교관의 신분을 얻었다. 한국 정부는 의심스러운 금융 거래로 인해 그의 직책을 정지 받은 후에 19567월에 그는 스위스로 돌아왔다. 그는 스위스 샤프하우센 (Schaffhausen)에서 태어난 뫼클리 (Margrit Moekli) 스위스 여성과 결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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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국내에서 교육을 받고, 중국에서 독립 활동

1장  국내에서 교육을 받음

그가 태어난 시기와 곳은 이조 (이씨 조선) 말엽인 1895년에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대한 자료는 아직 언급이 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학교는 서울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경신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한성YMCA에서 이승만 박사로 영어를 배웠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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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고등학교]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이다.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목사의 창설로 정동 32번지에서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언더우드 학당 (1886년5월11일)은 예수교학당 (1891년)으로 연동교회의 부속건물로 이전 (1901년1월)하였다.   

1905년에 교명을 [경신/儆新]이라 명명,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5년4월24일에 경신학교 대학부 (연희전문학교의 모체)를 설립, 1929년4월18일에  교지 [儆新]도 창간했다.

일제의 박해로 교사를 경기도 일시 양주군으로 이전 (1941년3월15일), 부산 남 부민동에 피난학교 개설 (1951년9월1일)한 적이 있으며 1955년4월1일 현재의 교지(혜회동 산 4)로 이전하교 [재단법인 경신학원]인가를 받아 발전한 학교이다. 2012년9월1일 제22대 교장으로 박정음 장로가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www.kyungshin.h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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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는 학교 외에 이승만 박사 (미국의 유학 후에 일시 한성(漢城, 현재 서울에 일시 귀국 시 (1910 -12년), YMCA에서 이승만박사로 영어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이 무렵 조선에 1906년에 보급이 된 호신술로 유도를 배운 것으로 추측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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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박사는 1910년 프린스턴大서  박사학위 받고 귀국, YMCA에서 교육활동 시작

이승만박사는 1910년에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일제(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돌아와 서울YMCA의 ‘학감’직을 맡아 청소년들에게 성경, 서양사(특히 미국사) 및 국제법 등을 가르치고 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방의 사립학교에 YMCA를 조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 총독부는 이승만이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105인 사건’에 연루시켜 체포·구금하려 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동아시아 총책 해리스 (Merriman C. Harris) 감독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하고 서울을 탈출,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자료 출처: 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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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Wikipedia - 샹하이(Shanghai)의 현재 [난킹로 거리]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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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국외/ 중국에서 활동한 일

1917년 경 (1957년 한국을 방문 시에 40년만에 고국 방문으로 언급으로 봐서) 또는 1919년의 31운동 후에  중국/만주로 가서 청년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것으로 여긴다. 공훈록에 보면 다른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19228월에 중국에서 청년 독립운동가의  조직 주비회(籌備會)에 소속 되여 활동한 것이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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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표회의 주비회(籌備會)이란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단체로 일명 [군사통일 주비회 (軍事統一籌備會)라고 하였으며 1921년4월20일에 설립되었다. 내용은 다름과 같다. 즉 1921년 중국 북경에서 개최되었던 군사단체의 통일에 관한 협의회로 설립목적은 1920년의 청산리·봉오동 독립전투에서 전략적으로는 승리했는데도 불구하고 만주에 있던 10여 개 군사단체의 행동이 일치되지 못해 결과적으로 독립운동단체의 대부분이 시베리아로 강제이동을 당하였다.

이런 이유 등으로 여러 군사단체가 서로 협의하여 통일단체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이 회의 내용은 1920년 9월 초 이회영(李會榮)·신숙(申肅)·박용만(朴容萬)·신채호(申采浩) 등 9명이 군사통일 촉성회를 발기했다. 대표로 배달무(裵達武)를 남만주에, 남공선(南公善)을 북만주에 각각 파견하여 각 군사 당국자들과 회합을 준비하였다.

국내 국민회의 박용만, 하와이 국민군의 김천호(金天浩)·박승선(朴承善)·김세사(金世唆), 간도국민회의 김구우(金九禺), 서로군정서의 송호(宋虎), 국내광복단의 권경지(權敬止), 하와이독립단의 권승근(權承根)·김현구(金鉉九)·박건병(朴建秉), 국내청년회의 이장호(李章浩)·이광동(李光東), 대한국민회의 남공선, 국내노동당의 김갑(金甲), 국내통일당의 신숙·신성모(申性模)·황학수(黃學秀) 등 10개 단체의 대표들이 1921년 4월 20일 북경 삼패자(三牌子) 화원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군사통일방침을 토의한 결과, 러시아에 주둔하는 부대는 국내 공격 시에 출동하고, 남만주와 북만주에 산재한 부대는 유격대를 편성하여 국경 방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지휘권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줄 것인지 따로 군사기관을 신설할 것인지를 토의하다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리가 드러나 임시정부를 부인할 것을 결정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이한호와 같이 언급되고 있는 [주비회]의 회원들과
후에 애국장의 공훈을 받은 자들

강석훈(姜錫勳, 18961985):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1996년 애국장 추허

다른 이름은 강만길(姜萬吉)이다. 본적은 함경북도 종성군(鐘城郡)이다.  1917년 3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약 2년간 길림성(吉林省) 혼춘현 대황구(大荒溝)에 있던 북일중학교(北一中學校)에 재학하였다. 1920년 5월 16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軍務部)에 소속되었고, 49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함경도 일대에서 입대 지원자와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21년 12월 16일 북간도 지역에서 대한독립군 제 3대장으로서, 문창학(文昌學)‧ 김학섭(金學燮)  등과 함께 일본 경찰서 및 신건원수비대(新乾源守備隊)를 습격하였으며, 이때 궐석재판(闕席裁判)에 포함되어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꾸준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국 상해(上海)에서 개최되었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도 참석하였다.
1996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자료출처: http://w3devlabs.net/korea/archives/tag/%EA%B0%95%EC%84%9D%ED%9B%88 

박태열 (1894 – 미상): 광복군 총영, 1968년에 [독립장]을 추서함 

황해도 은율(殷栗) 사람이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17세의 나이로 간도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18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족회 (韓族會)에 가입하였다. 1919년에는 오동진(吳東振)·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 등과 더불어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7월에는 관전현(寬甸縣)에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조직에 참여하여 오동진을 총영장으로 하고, 그는 장덕진·조병준 (趙秉準)·윤하진 등과 함께 그 막료가 되어 무장항일 활동을 계속하였다. - - - - -

1922년 8월에는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김성득(金成得)·방달성(方達成)·장덕진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독립운동 노선을 통일해야한다는 '선언(宣言)'을 반포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나석주(羅錫疇)가 식산은행을 폭파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 . . .1937년 2월 8일 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  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3293&ipp=10

 

장덕진 (1898 ~1924.8.27), 광복군 총영, 1963년에 [독립장] 훈장 추서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와 동아일보 간도 특파원으로 실종 순국한 추송 장덕준(秋松 張德俊)과 형제간으로 끝의 동생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하여 오동진(吳東振)·박태열(朴泰烈) 등과 같이 광제청년단 (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2월 광복군 총영(光復軍總營)이 만주의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을 총망라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게 되자 총영장 오동진의 막료로 임명되어 조병준(趙秉俊)· 윤하진(尹河振)·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무장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8월에 미국의원단이 내한하는 기회를 타서 일제의 중요기관 폭파 및 고관암살의 밀명을 띠고 국내에 파견되었다.  - - - - -

1922년 8월에 그는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 등 10명이 연서하여 국민대표회의 주비회(籌備會)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하여 분열되는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23년 12월 26일에는 최천호(崔天浩)와 함께 [상해 교민단]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임명되어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의경대 고문인 김 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활동하였다. 1924년 3월 21일에는 상해의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그 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종철(金鍾喆)·김문희(金文熙)와 같이 계속 활동하던 중 1924년 8월 16일 중국인에게 저격당하여 광자병원(廣慈病院)에서 별세하였으며, 동지들의 애도 속에 상해 갑북황가남묘(閘北黃家楠廟)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 / 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6730&ipp=10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조일문, 애국동지원호회, 1956)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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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ong Ziyul  -  [칼스루헤공과대학] (Karlsruhe Technische Hochschule]의 한 건물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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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한호의 유럽에서 활동

1장: 일제 강점시 초반에 유럽에서 유학 및 활동한  한인들의  일부

일제 강점기 (1910년 – 1945년)의 초기에 유럽에 와서 수학이나 활동한 ‘Korean” 은 많지 않았다.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에 호소 차 1919년 4월에 온 김규식 박사를 도울 수 있는 체류자는 불과 10명 미만이었다고 한다.  이 때에 김규식 박사를 도와준 한 사람으로 영국을 거처 스위스에 와서 [취리히대학교]에서 유학한 이관용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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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李灌鎔, 1894-1933)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한국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도 참여했으며 구미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다른 이름 李灌溶, 李瓘鎔, 李鑵鎔, 李冠鎔, 李灌龍) 등을 사용했다.  . . . . . 

1914 3 옥스퍼드 대학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16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초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와 즉 1919년 4월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에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조직하고 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7월 17일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 조소앙과 한국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요구안’을 제출하였고, 이후 8월부터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파리위원부와 한인위원회가 통합되어 구미외교위원부가 되자 구미외교위원회 주불대표부의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10일에 사임하고, 1920년 1월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大韓赤十字社 歐洲支部長)으로 스위스의 국제적십자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정부 적십자사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였고, 동년 10월 12일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하였으며, 1921년 2월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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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조약] 이란

파리 강화 회의(Paris Peace Conference)는 1919년에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 들이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 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한 국제 회의이다. 회의는 1919년 1월 18일 개최되어 1920년1월21일까지 간격을 두고 지속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의 관계신한청년당은 1919년1월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윌슨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기대를 하였고, 김규식도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발표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과 함께 전범국 처리를 논의하던 것이었다.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강화회의에서는 답을 주지 않았고, 1919년7월1일 김규식은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한국대표로 참석할 수 있도록 프랑스 외교부에다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서신을 보냈으나, 응답은 행사가 끝난 다음에 왔다. 열강의 그 어느 국가나, 그 누구도 아무도 김규식 일행의 한국 독립 청원을 호응해주지 않게 되면서 김규식은 크게 실망하였고, 8월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파리 위원부]에 대한 기사 참조 /  www.815family.or.kr/independence/view.php?id=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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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이한호의 독일에 수학 차 체류

이한호의 독일 유학에 대한 것은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 의 1925년 초에 작성한 회원 명단에 들어 있으며 전공분야는 [공학]으로 표시되어 있다. 스위스 오기 전의 기록으로 독일 칼스루헤(Karsruhe)에 체류한 것이 언급되고 있으며, 1924/25년 겨울학기에 칼스루헤 공과대학 (Technische Hochschule Karsruhe)에서 건축학에 대한 강의를 1학기 들었다. 그런데 독일에 온 것은 아마 1923과 1924년 사이로 여기는데 정확히 언제 온 것과 체류기간은 아직 확실하게 파악을 못하고 있다.

1925년 당시 독일 내 유학생은 32명으로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공인태수리학·계정식음악·김백평생물학·김필수경제·김현준경제·김재훈음악김상수의학·김종성공과·김숙례문학·박성채?·박유진법학·박주병의학배운성예술·백준철학·안호상철학·원형택역사학·윤건세법학·윤동섭문학이극로경제·이석중의학,,,·이의경생물학·이훈법학·이한호공학·장득우공학정상종경제·정석태의학·정석호음악·정세희?·최동선음악·최창헌공학황우일경제·황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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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유학 한인학생들을 중심으로 1921년 1월 1일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 獨逸留學高麗學友會)를 결성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를 창립할 당시 주요 인물은 김갑수(金甲洙)·윤건중(尹建重) 등 11명 내외였다. 설립 목적은 학생 자체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의 자치와 외교에 관한 활동을 주관하기 위함이었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 1920년대 독일 거류한인들의 수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23년의 경우 한인거류인은 55명이고 유학생은 10개 대학 33명으로 총 88명이었다. 주요 인물은 간사 장을 맡고 있었던 김갑수와 서무를 맡고 있었던 윤건중 등이었으며, 1923년의 경우 이극로 (李克魯)·김준연(金俊淵) 등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기록에 의하면 서무 또는 서기에 이극로, 회계에 김필수(金弼洙)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4년 5월 현재 한인 유학생은 58명, 1925년 4월경에는 52~53명 정도라고 한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칸트슈트라세 (Kantstraße) 122번지였고, 자신들의  기관지로『회보 (Heba)』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알렸다. 이 잡지는 1925년 10월 당시 제4호가 발간된 것으로 보아, 1923년 10월 26일 개최된 ‘재독한인대회’ 이후부터인 1924년경에 출간된 것 같다. 유덕고려학우회의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으로 학업을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상호간의 구제활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 및 대외선전활동, 유럽에서 개최되는 민간차원의 국제대회 참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921년 11월경 「통고문」이라는 선전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 지지와 존속을 위한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였다.

자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26991&cid=46623&categoryId=4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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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ongZiyul - 스위스 최대의 도시 취리히(Zurich)의 아름다운 호수 풍경

 

3 스위스에서  활동유도(柔道) 보급에 공헌스위스에 유도 선구자

독일 유학생 명단에 언급된 32 중에 사람이던 이한호는 1925 여름에 스위스 취리히로 옮겨서 1925/26년 겨울학기에  [취리히대학고 / Universitaet Zuerich] 법학대학의 경제과에 등록을 하고 오래동안  수학을 하였으며,   대학교에서 1936423일에 Diplom 학위 (현재 석사에 해당) 받았다 

학업 외에 특히 호신용 스포츠 [유도] 스위스에 처음으로 보급하는데 공을 세우게 된다.  평소 신체건강과 호신의 목적으로 유도기술을 습득하여, 1927년에 취리히대학에서 유도클럽을 조직하여 기술지도와  유도인 양성 등으로  유도보급을 시작하였다.”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유학에 대한  Google  독문 자료에 나타난 원문에는 약간 잘못되어 있다.  

1929년에 스위스 취리히 (Zürich) 에서 첫 유도학교/도장 [Judo Sport Klub Zuerich]을 세웠다. 그 후 1936/37년에는 [스위스 유도협회]의 창설에 관여했으며 회장이 되었다. 이 회장직은 1940년까지 활동했다. 1948년6월에는 [오스트리아 아마추어 유도협회]의 첫 여름학교를 [스위스 연방 스포츠학교]에서 이끌었다. 이한호는 유도에서 7단(Dan)의 대가 급에 도달했다.  즉 1953년 대한 유도회로부터 7단을 받았다.

이한호는 스위스 아펜쩰 (Appenzell) 에서 향수자료 생산자로 활동하고 있을 때, 1954년에 서독 (독일 연방공화국)의 수도 본 (Bonn) 주재 대한민국의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총영사관을 위해서 그의 사택을 레마겐 (Remagen) 에 소재하는 건물 [Haus auf Leims] 를 총영사관으로 본국정부의 알리지 않고 임대했다. 서독정부로 부터는  [대한민국의 무역대표부]로 인정을 받고 외교관의 신분을 얻었다. 한국 정부는 의심스러운 금융 거래로 인해 그의 직책을 정지 받은 후에 19567월에 그는 스위스로 돌아왔다. 그는 스위스 샤프하우센 (Schaffhausen)에서 태어난 뫼클리 (Margrit Moekli) 스위스 여성과 결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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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의 독어 원문 참조) 

Hanho Hopan Rhi (* 1895; † 18. September 1960 in Schaffhausen) war ein südkoreanischer Unternehmer und Judopionier in der Schweiz. 

Rhi war ein Neffe des südkoreanischen Staatspräsidenten Rhee Syng-man. Er studierte an der ETH Zürich und wurde dort promoviert.

1927 lehrte Rhi erstmals Judo in der Schweiz und brachte damit diese Kampfsportart in das Land. 1929 gründete er die erste Jiu Jitsu-Schule der Schweiz in Zürich, wobei er aber bereits ein verfeinertes Judo lehrte.[5] Zu seinen Schülern aus dieser Zeit gehörten unter anderem Hans Hartmann und Robert Tobler. Rhi war wesentlich an der Gründung des Schweizerischen Judoverbands 1936/37 beteiligt.

Im Juni 1948 leitete Rhi in der Bundessportschule Schielleiten die erste Verbands-Sommerschule des Österreichischen Amateur Judo Verbandes. Rhi erreichte im Judo den Meistergrad des 7. Dan. 

Rhi, der zuletzt im schweizerischen Appenzell als Riechstoffproduzent tätig war, wurde 1954 als südkoreanischer Generalkonsul für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an den seinerzeitigen Regierungssitz Bonn entsandt. Dort mietete er für das Generalkonsulat und als seine private Unterkunft das Haus auf Leims in Remagen. Rhi gelang es, dass das Generalkonsulat ohne Wissen seiner Regierung seitens der Bundesrepublik als Handelsvertretung der Republik Korea anerkannt wurde und damit einen diplomatischen Status erhielt. Im Juli 1956 kehrte Rhi in die Schweiz zurück, nachdem die koreanische Regierung seine Geschäftsführung aufgrund von fraglichen Finanztransaktionen beanstandet hatte. (Siehe auch: Haus auf Leims#Südkoreanisches Generalkonsulat)

Rhi war mit Margrit geborene Mökli, einer Schweizerin aus Schaffhausen verheiratet.

자료 출처 / https://de.wikipedia.org/wiki/Hanho_R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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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wiss Judo Asso. - 1937년 [스위스 유도협회] 창립시 사진 (이한호 박사, 앞줄 왼편에서 3번째) 

         (c)Swiss Judo Asso. -  이한호박사의 [스위스 유도협회] 초대 회장 (1937-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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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취리히/스위스에 유도 도입/보급

“Koreaner’ (한국인) 이한호는 1925년에 스위스로 옮겨서 취리히 소재 대학교에서 수학을 하게 된다한국의 자료에는 취리히 대학교를 다녀서 경제학박사를 취득 했다.” 되어 있다. 그러나 독문으로 보면 취리히 소재 연방공과대학교 (ETH) 약학과에 등록을 해서 수학을 것으로 되여 있다 

취리히 시는 스위스 최대 (현재 인구 38 )에는 대학교가 2 있다. 하나는1833년에 설립된 [주립 대학교] [Universitaet Zuerich, www.uzh.ch] 다른 하나는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1955년에 설립된 [국립공과대학교] ETH Zuerich, www.eth.ch ] 있어서 당시에 정확한 구별이 어려웠다.

1927년에 취리히에 소재하는 양兩대학교와 다른 전문대학의 대학생들을 위한 스포츠 기관으로 [ ASVZ = Akademisch Sports Verein Zürich)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한호는 여기서 유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  www.asvz.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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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 취리히에 이한호는 12명의 학생으로 스위스 최초의 유도 도장을 설립하었다.  이어서  스위스의 여러 곳에 유도 도장/학교가 설립함을 언급하고 있다. (자료: 스위스 유도 역사 / www.fudschisan.ch/judo/geschichte.html

[취리히](Zurich) 스위스 최대의 도시로 교육, 문화, 교통 경제 금융 등의 중심지이다. / www.zuerich.com    

이한호는 일본에게 외교권이 빼았긴 강점기였으나  “Koreaner (독어: 고려인, 조선인, 한국인)”로서 유도를 스위스에 보급 그리고 [스위스유도협회]를 창립 및 회장으로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스위스 유도협회]를 1937년에 창설하고 1940년까지 초대 및 2대의 회장으로 봉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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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스위스의 활동한 자료는 주로 독문으로 된 [스위스유도협회 75주년] 기념책자와 각 유도 도장의 역사 서술한 독문 그리고 독일에서 발간하는 유력 주간잡지 [Spiegel] 에서 얻은 자료 들이다.

  1. 바셀 (Basel)

바셀의 유도 클럽은 193559일에 스위스에서 부도(武道) 가장 오랜 클럽의 하나로 창립 되었다창립 기록에 창립자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35728일에  [바셀무술클럽]이란 것만 언급되고 있다. 1945년에  [바셀유도클럽] (Basel Judo Club)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유는 스위스 연맹에 속하는 모든 클럽은 [유도클럽/협회] 명명하였다오늘날 바셀클럽은 스위스의 최대 유도클럽에 속한다.

(Der Verein wurde als einer der ältesten Budo-Vereine in der Schweiz am 9. Mai 1935 gegründet. Im Grüdundungsprotokoll wird kein Name vermerkt. Dieser wurde erst am 28. Juli 1935 mit Jiu-Jitsu-Club Basel angegeben. 1945 erfolgt die Namensänderung auf Judo Club Basel. Grund: Alle dem Schweizerischen Verband angeschlossenen Vereine nennen sich Judo-Club. Heute gehört der Verein zu den grössten Judo-Clubs in der Schweiz.)

https://de.wikipedia.org/wiki/Judo_Club_Basel   /   www.judobasel.com 

바셀 (Basel) – 스위스 북서부에 위치하는 국경도시이다. / www.bas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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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쌍트 갈렌 (St. Gallen) 도장 설립에 협조

[쌍트 갈렌 유도 클럽] 벌써 1936년에 태어났다. 그래서 [쌍트 갈렌 유도협회] [스위스 유도협회] [취리히 유도협회, JJJC Zurich] [바셀 유도협회, JC Basel] 함께 창립 멤버에 속한다. 클럽은 80년의 역사를 가지며 그간 어려웠지만 성공적으로 발전이 되었다. 어려움 특히 19399월에 2 세계대전 발발하자  도장은 [레온하르트학교교사](Leonhard-Schulhaus) 지하실에서 불안정한 조건에서 훈련한 것이다. 그러나 Leo Senn박사와 불굴의 이한호 박사의 덕분으로 유도는 전후에도 계속 발전 하였다.   

막스 훙거뷜러 (Max Hungerbuehler)씨의 덕분으로 1951년에 도장이St. Georgen-Strasse에 생기고 1968년에는 Muehleggtreppe로 옮기게 된다. 도장을 옮긴 첫 결실이 나타났다. 이미 3년 후에 [쌍트 갈렌 유도클럽]은 스위스의 가장 강한/무서운 유도클럽이 되었다. 그 당시 심지어 프랑스어권의 도장들도 이 강한 동부 스위스의 클럽에 한번도 도전하지 못했다. 이 클럽은 도교 히라노 (Hirano) 의  2번 세계챔피어인 이한호박사, 대가 미후로 콘도 (Mihuro Kondo) 및 스위스 최고의 기술자 Tehodor Misslin등의 톱 지도자들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Klub-Geschichte von St. Gallen / www.jcsg.ch/unserclub-m/club-geschichte

쌍트 갈렌 (St. Gallen): 동부 스위스의 가장 중심도시www.st.gallen-bodense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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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에 취리히, 바젤 및 쌍트갈렌의 유도클럽을 합하여 [스위스유도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여 1940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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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하우센 (Schaffhausen) 유도 보급

20세기 초에 벌써 일본 유도 교사들이 유럽과 스위스에 왔다. 1929년에 한국유학생 이한호가 스위스 취리히에 첫 클럽을 설립했다. 이한호는 이후에 샤프하우센의 여성과 결혼을 하였기에 이 도시에 유도 도장 설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러나 처음에 하나로 설립하였으나, 나중에 유감스럽게도 이해관계가 다른 2개의 협회로 나누어졌다. 이 2개의 협회는 오래 동안 각자의 방법으로 유지되었다. 1971년에야 2 다른 것 (하나는 벌써 존재하지 않았으나) 클럽이 하나 [샤프하우센유도클럽 / Judo Club Schaffhausen]로 합했다. 

자료 출처: Judo Club Schaffhausen / www.judo-club-schaffhausen.ch/joomla/index.php/ueber-uns

샤프하우센 (Schaffhausen) – 북쪽 관문의 도시 / www.schaffhauserland.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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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9월28일에 이한호에 의해서 [스위스 유단자협회] 스위스와 다른 곳에 창립되였다. 

 (http://www.kiaicham.ch/newsite/index.php/judo/geschichte-von-jud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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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wiss Judo Asso. -  193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개최된 [국제유도하기학교]의 참가자들 (두째 열 왼편 이한호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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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나라에 유도를 보급하는데 공헌을 사례  

이한호박사는 취리히에서 유도클럽을 조직하고 그 클럽을 이끌었으며 이 외에 스위스의 다른 도시와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까지 유도의 보급•지도에 진력했다.

1933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유도국제하기학교]를 스위스의 이한호박사의 주도하에 여러 일본 고단자 교사들과 함께 실시 거행하였다.  

1936년에 처음으로 외국의 팀 즉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수 팀과 국제친선 경기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1. Die Gründung des  ÖAJV (오스트리아 유도협회) 창립

[오스트리아 유도협회] 1948년에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인츠 코봘스키 (Heiz Kowalski)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협회는 1947/48년에 2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새로 태어난 협회는 공식활동으로 [유럽유도협회 = EJU] 참가하는 것을 결정했다.  [유럽유도협회] 비공식 설립은 1948726일에 런던에서 설립했다. 창립의회에 프란츠 님퓌어 (Franz Nimfuehr) 프로스퍼 부헬레 (Prosper Buchelle)씨를 파견했다. [유럽유도협회] 공식적 설립은 19491029일에 네덜란드에서 개최되었다. 협회는 1952년에 [국제유도연맹 = IJF] 변환하였으며 동시에 오늘날의 개존하는 [유럽유도협회] 형성되었다.   

이 외에 스위스와 독일의 표본에 따라 협회하기학교 실시를 결정했다. 

이런 첫 번째 코스는 1948년6월20일부터 26일까지 쉬일라이텐 (Schielleiten) 연방 스포츠학교에서 스위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이한호박사의 지도하에 개최되었다.  1년 후의 여름 수련코스는 [연방체육 연구소 = BAfL]와 협력으로 실시되었으며 3주간 계속되었다. 계속해서 현재까지 있는  이 코스에 강연자로 위대한 거장 이박사가 하였다.  이박사 외에 특히 Noritomo Otani,  Fukuda, Tokio Hirano,  Kazuzo Kudo,  Skokichi Natsui, Mahito Ogho, Anton Geesink 등의 여러 거장들이 었다. 

1950년,  창업에서 2년 후, [오스트리아유도협회]는  9 클럽 (이 중에 7은 비엔나에서, 2 클럽은 잘츠부르크에서) 과 등록된 합계 800명의 유도를 배우는 사람들을 가진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금년은 협회의 회장이 칼 나글 (Karl Nagl)씨가  하인츠 코봘스키에서 바뀌었다.    

자료 출처: Die Gründung des ÖAJV, (Österreichischer Judoverband  1948)

오스트리아 (Austria) – 스위스 동쪽의 이웃 나라로 관광에 매력이 다양한 나라 / www.austri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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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ayerische Judo Verband (독일 바이에른 유도협회) 

로베르트 로트 (Robert Roth) 바이에른의  유도 처음 세대에 속할 뿐만 아니라 선구자로 표시하나  그의 50년간 뮌헨과 주위지역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로버르트 로트는 1957/58년에 정육점 (푸줏간) 대한 고급 교육을 받기 위해서 스위스로 간다.  

여기서 그는 그가 좋아하는 유도 스푸츠에 전심했다다행한 것은, 여기 쌍트 갈렌에서 그는 한국인 약사 이한호박사를 알게 것이다.  이한호박사는 Kowaishi (프랑스),  Koizumi (영국) 함께 오늘날  유럽 유도개척자 중에 하나이다.   

자료 출처: www.b-j-v.de/home/personen/show/die-legende-lebt   

바이에른 (Bayern) 현재 남부 독일의 ( 때는 나라)  / www.bayer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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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한국 유도 / 이한호 박사 전수

한국의 독립투사 이한호 박사가 최초로 한국 유도를 「스위스]에 심은 이래 현재 「스위스」에는 80여개의 유도「클럽」과 45백여명의 회원이 있다. 일본식이 아닌 순수한 한국식 유도로 가는 스위스는 이제 「유럽」제일의 유도 강국이 되었다.
지난 312 상오8시부터는 「상·갈렌」의「에케하르트·호텔」연회실에서 이한호 박사의 추모를 겸한 「상·갈렌」유도30 기념축제가 열렸다. 「스위스」유도「클럽」 주최로 거행된 축제는 5백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아리랑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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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거뷜러씨   노력으로 구주서  최강 -|80여개「클럽」에  회원만도 4,500
주한 불대사 전규흥씨의 사위이며 58년 한국유도협회에서 4단으로 인정받은 바 있는 막스 ·풍거뷜러」회장은 이 자리에서 고 이 박사의 유덕을 치하했으며 유도의 원칙을 간단히 소개하고, 이어 유도·검도·태권 등의 시범「게임」이 있었다.
1955년 여름 석진경 방영두 박정준씨 등 한국 유도의 권위자들이 이곳을 찾아 한국 유도의 처녀 시범과 함께 하기 강습회를 열어 막대한 성과를 올렸으며 이래 「스위스」에 남겨진 한국의 인상은 어떤 외교적 노력으로써도 얻어질 수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고 이 박사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한국의 넋을 「스위스」에 심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는 「풍거뷜러」씨는 부인 전영숙 여사와 4살짜리 딸 「코지마」, 두 살짜리 아들 「마르크」군과 함께 조촐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동양, 특히 한국의 고전 미술과 음악에 취미와 조예가 깊은 동씨는 60년8월에는「상·갈렌」박물관에서 한국 조각 미술전시회를 연적도 있다. 작년에도 무역 관계로 한국을 다녀온 바 있는 동씨는 금년 5월엔 가족 모두가 서울에 있는 장인 댁에 가서 반년쯤 지내고 올 계획이라고 한다. 【조혜자 통신원】
[출처: 중앙일보] 『스위스』와 한국 유도|고 이한호 박사가 처음 전수

자료: 중앙일보, 1966. 4. 19 조혜자 통신원 / http://news.joins.com/article/1037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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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柔道) 역사
우리나라 고유의 무술(武術)로 알려진 『수박(手搏)』으로 시작된 유도의 기원은 정확한 시기와 창시자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다만 故 이제황(李濟晃)선생의 저서 [新柔道]에 『우리나라의 유도가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A.D. 197∼ 226)때의 왕도(王都)였던 환도성(丸都城) 각저봉 현실(玄室)의 벽화(壁畵)가 말하여 준다』고 되어 있다.
또 『그러나 오늘의 유도(柔道)가 유술(柔術)로서 발달(發達)한 것은 고려(高麗) 중엽(中葉)부터 이다. 즉, 고려 제15대 숙종(肅宗)왕(1097∼1106)代에 이르러는 일종(一種)의 정재(呈才)로서 음악(音樂)과 더불어 장려(奬勵)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이때는 유술(柔術)을 수박(手搏) 또는 각저라 불렀다. 왕은 이를 애호(愛好)하여 상춘정(賞春亭)이나 마암(馬岩) 등지에 거동할 때는 수박희(手搏戱)를 연시(演示)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종(仁宗)왕(1123∼1146)때에는 무인(武人)의 세력(勢力)이 커지면서 이를 군인(軍人)들의 상예 (常藝)로 장려하였다. 또한, 고려(高麗)에서는 매년(每年) 5월이 되면 연중행사 (年中行事)로서 대시합(大試合)을 열었다 하였고, 그 당시 유술(柔術)에는 25法이 있었으며 그밖에 10種의 비법(秘法)이 있었다 한다. 급소(急所)지르기 등 25法은 신법(身法), 수법(手法), 각법(脚法)을 주축(主軸)으로 하여 비등(飛騰), 전기(顚起), 도삽, 횡권(橫券), 활착(活捉), 조천(朝天) 등으로 변화를 이룬다고 되어 있다. 그 후 비법(秘法)은 비전 (秘傳)으로 구전심수(口傳心授)되어 내려오다가 이 비법(秘法)들은 임진왜란 (壬辰倭亂)때 일본(日本)으로 이식(移植)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1882년에 강도관 유도의 창설자(創設者)인 가노지고로(嘉納 治五郞)는 그때까지 전해 내려온 유술(柔術)의 각 유파(流波)중에서 좋은 것은 택하고 위험(危險)한 것은 제외했다. 그는 여기에다 새로운 기술(技術)을 첨가(添加)함으로써 정신수양과 체육의 목적인 오늘의 유도(柔道)를 완성했다. 

가노 지고로(1860∼1938)가 집대성했다. 즉, 과학적 기초 위에 새로운 체련법, 수심법, 승부 법을 정하여 유도라 칭한 후 1882년 강도 관을 세워 교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까지의 유도는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덤벼들어 치고 받고, 잡고 넘어뜨리고, 누르고, 조르고, 꺾고 하던 종합 무술이 전부였다. 그러나 서구의 스포츠에 영향을 크게 받아 일부는 태권도와 씨름으로 분리 되어 계속 발전되었고 일부는 오늘날 유도로 발전되어 왔다. 그러다가 1952년 국제 유도연맹이 조직되고 1952년 동경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됨으로써 유도의 국제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유일하게 동양에서 발달되어, 1964년 제 18회 동경 올림픽대화부터 정식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된 유도는 힘, 기술, 그리고 정신력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강한 매력을 지닌 경기로서 현대 사회에서 역동적인 스포츠로 확립되었다.
현대 I. J. F.(국제유도연맹)의 회원국은 5개 대륙연맹에 속한 175개 국가이며, 한국은 1956년 가입한 이후 1990년대부터 국제유도를 이끌어 오고 있다.    . . . . .


  1. 유도의 의의(意義 )
    유(柔)의 의미는 초목의 새싹을 말하고, 중심이 되는 심은 강직하고 씩씩하므로 사물을 움직이며 신체는 유연하고, 심은 욕심껏 공방 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무리하지 않고 도리에 순응하며 승리를 하는 것, 다시 말해 순리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뜻한다.
    그 원리를 설명하면, 10의 힘으로 밀어 오는 상대에게는 그 힘에 맞서지 않고 자기가 물러서서 그 10의 힘을 전력 발휘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 몸은 안정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자신의 힘이 5일지라도 상대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3의 힘을 이용해서도 승리할 수가 있으며, 2의 힘이 남게 된다. 이 남아 있는 힘을 타에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즉 상대의 힘을 내 힘으로 활용하여 역학적인 원리로 사용하면, 작은 힘으로도 능히 큰 힘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은 힘을 이용하여 큰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유도(柔道) 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이다.
    ()는 동양 도덕의 중심을 뚫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원칙으로 인간이 필히 따라야 할 원칙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 전반을 통한 대도라는 의미로 풀이되어 심신일체에의 행을 통하여 그 대도를 얻는 것이다. (도道는 길 또는 정신수양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다운 길, 정도의 길, 수련의 방법을 의미한다).
    유도는 심신의 힘을 가장 유효하게 사용하는 도이다. 그 수행은 공격과 방어의 연습에 의해서 신체 정신을 단련, 수양하고 그 도의 진수를 체득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자기를 완성하고 세상에 보익하는 것이 유도 수련의 주된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정력선용", "자타공영"이 그 의의이다. 정력선용이란 강한 훈련을 통하여 얻은 건강한 체력, 건전한 정신력을 의롭고 선한 방법으로 이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타공영이란 유도의 깊은 뜻을 정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통하는 것이어서, 기반에 행이라는 실천적 수련이 깊이 내장되어 있다. 유도 수련에 의해서 달성된다고 생각되는 이상의 경지를 지적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상대도 공히 번영한다는 것으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호협력의 정신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전력을 선한 것을 위하여 유효하게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완성하고, 인류와 사회에 이익이 되게 함으로써 자기도 타인도 공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유도 기술에 일관하는 원리인 동시에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원리로서 유의 도이다. 이렇듯 유의 본성을 갖고 있는 심신을 최대한 유효하게 하는 유도는 인간으로서의 희망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1. 근대화된 한국유도
    근대화(近代化)된 유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에 관하여 여러 설들이 주장되고 있다. 고故 이제황 (李濟晃)선생의 저서 [신유도(新柔道)]에 의하면 체계화된 유도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1909년에 유도를 시행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유도부에서 유도 용어를 우리말로 제정하여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29년 9월에는 전조선(前朝鮮) 중학교 유도대회가 동경(東京)유학생(留學生) 무도회 (武道會) 주최로 열렸다. 같은 해 10월에는 황성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전조선단체유도대회 (前朝鮮團體柔道大會)가 개최되었으며 1930년 6월에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에서 전 조선중등학교 (朝鮮中等學校) 대항(對抗)유도 대회가 개최되었다.
    다음해인 1931년에는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이 이경석선생에 의해 개설되었으며 1932년에는 조선유도연맹회(朝鮮柔道聯盟會)가 조직(組織)되었다. 그 이후에도 1934년에는 조선유도유단자회 (朝鮮柔道有段者會)가 결성되어 활성화되어 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 말기(末期)인 1938년에 이르러 일제 하에 모든 도장(道場)을 강도관(講道館) 조선지부(朝鮮支部)로 강제(强制) 통합(統合)되는 시련(試鍊)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해방(解放)이 되자 그 해 10월에 재경유도유단자 (在京柔道有段者) 일백 여명이 조선유도연맹(朝鮮柔道聯盟)을 결성하여 한국(韓國)유도를 재 부활(復活) 시켰으며 유도(柔道) 용어(用語)를 새로이 제정(制定)하였다.
또한, 1952년에는 국제유도연맹이 결성되면서 세계화가 되었으며, 한국유도를 이끌 중견지도자 양성(養成)을 목적(目的)으로  대한유도학교가 故 이제황 선생에 의해 1953년도에 설립(設立)되었다.
1956년에는 재단법인(財團法人) 한국 유도 원이 발족(發足)되었고 그 해에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유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採擇)되었다.

1984년 미국(美國) LA올림픽에서 안병근 선수의 첫 금메달 획득(獲得)을 시작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유도가 드디어 종합1위의 성적을 거두는 업적을 세웠다. 날로 유도가 세계(世界)대회 및 국제(國際)대회에서 국위(國威)선양(宣揚)을 하고 한국유도의 위상(位相)을 드높이고 있다. 한편, 여자 유도는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에 이어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5년 9월 일본 지바 마쿠하리에서 개최된 국제유도연맹 (I.J.F) 총회(總會)에서 우리나라가 제7대 회장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올림픽 정식종목 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전 세계 175개국의 회원국이 가맹된 국제연맹회장(朴容晟, 1940)국이 된 것이며, 대한민국 유도계 뿐만 아니라 한국 체육사에 영원히 기록될 사항이다.

자료 출처?

국제유도연맹 (International Judo Federation):

www.intjudo.eu/The_Diffusion_of_Judo/A_few_chronology_markers_/A_few_chronology_mar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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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ong Ziyul  -  국제연맹 (UN의 전신)의 본부 소재지로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 제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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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33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이승만박사를 안내

1933년초에 이한호는 독문 신문을 통해서 자기가  서울 YMCA에서 영어를 배웠던 은사  (恩師이승만 박사가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 기구에 호소 방문하게 됨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동서인  건축가 뮐러 (H. Muller)씨와 함께 제네바를 방문하여 부활절 휴가 이승만 박사를 취리히에 초청하는 제안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박사로는 구라파 체제 ,  20여년 서울에서 가르쳤던 제자 이한호와 상봉하는 행운을 얻어 그의 안내로 스위스의 명승지를 여러 구석을  관람할 있었다. 이한호는 세계적 하키선수로서 스위스 여성과 결혼한 이한호는 취리히에서 유도사범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기 동서인부처와 함께 이승만을 찾아가 만난 여러모로 극진히 대접했다.  

 

이승만박사의 스위스 방문

이승만박사가 제네바를 찾아가게 된 것은 1931년 9월부터 개시된 일본군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국제회의가 1933년 초에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본부,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회의야말로 한국독립문제를 다시 한번 세계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제네바 행을 서둘렀다. 그는 미 국무장관 스팀슨(Harry L. Stimson)이 서명한 '외교관 여권'을 얻어 1932년 12월 23일 뉴욕을 떠났다.

1933년 1월 4일 제네바에 도착한 그는 호텔 드 루시 (Hotel De Russie)에 여장을 풀고 파리의 [한국대표부] (Agence Korea)에서 일하고 있던 서영해의 도움을 받아 국제연맹회의에 모여든 중국대표 단원들 (W.W. Yen·Kuo Taipchi·V.K. Wellinton Koo·victor Hoo·Ko King-chen)과 제휴, 그들과 함께 일본의 대륙침략을 지탄·공격하는 외교활동을 폈다. 이때 이승만박사가  추구한 목표는 국제연맹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케 하여 그 회원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을 위시한 각국 대표들이 이 회의에서 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이승만박사는 일제가 급조한 만주국의 괴뢰 성을 폭로하고 만주에 사는 '100만' 한인의 자율권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춘 외교를 폈다. 2월 8일 그는 한국인의 주장을 담은 공한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세계 주요언론사 기자들에게 우송-배포하였다. 제네바에서 그는 세계굴지의 외교관 및 언론인과 폭넓게 교제하면서 동양평화의 담보로서 한국독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승만의 이 같은 단신 외교는 2월 24일 국제연맹 본회의에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한 내용의 '리튼 보고서'(The Lytton Report)가 채택되고, 이어서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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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모스크바 등지에서 눈부신 독립외교를 펼치던 이승만은 틈틈히 짬을 내어 구라파의 주요 도시들을 역방, 명승지와 고적을 관광하였다. 제네바에 머물 때 그는 파리와 런던을 방문하여 그곳의 역사 유적을 관광했다. 모스크바를 다녀올 때 두 번 빈을 방문하여 근처의 명승지와 고적을 둘러보았고 또 부다페스트도 관광했다. 구라파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이태리로 여행하여  밀라노·플로렌스·로마·제노아·니스 그리고 모나코 등지를 두루 유람하였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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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ong Ziyul  - 낙차하는 수량으로 봐서 유럽 최대의 폭포인 [라인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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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復活節) 휴가를 제자 가족과 함께
이승만(李承晩)박사는 이한호의 초청으로 413일부터 17일까지 취리히에 가서 부활절 주말을 그의 가족들과 같이 보냈다. 李承晩은 413 아침에 급행열차로 취리히로 갔다. 역에는 이한호가 마중 나와 있었고, 그의 동서 뮐러(H. Muller) 포드 차를 몰고 와서 함께 이한호의 집으로 갔다. 뮐러는 건축가이자 취리히 하키팀 주장이었다 

이튿날 李承晩과 이한호는 취리히 호수로 가서 산보를 하고 보트도 타고 하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이한호는 최근에 시베리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서 李承晩에게 시베리아 방문을 강력히 권했다. 그는 李承晩이 시베리아를 방문한다면 소련에서는 독일어가 통하니까 자기가 통역으로 수행 하겠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기회에 소련 당국자들을 만나 보고 시베리아 동포들과도 관계를 맺고 돌아오는 것이 독립운동에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이한호 내외와 함께 라인폭포(Rhein Fall) 구경하고 왔다. 라인폭포는 취리히에서 50마일쯤 떨어져 있는 중부유럽에서 가장 장관인 폭포이다

 
415일에는 이한호와 뮐러가 출전한 취리히팀과 스페인팀의 하키 시합을 구경했다.


416일은 부활절이었다. 李承晩은 이한호 내외와 뮐러 내외와 함께 뮐러의 차로 특별 관광을 했다. 오전 830분에 출발하여 취리히 호수의 남쪽 길을 따라 여러 도시들을 통과하면서 드라이브를 하고, 북쪽 길을 따라 오후 915분에 취리히에 돌아왔다.

높은 속에 있는 발렌제(Wallensee) 경관이 특별히 아름다웠다. 날씨도 아주 좋았다. 李承晩은 이날의 여행을 〈결코 잊을 없다〉고 그의 「여행일지」에 적어 놓았다. 그만큼 마음 편안한 시간이었다.  이날 드라이브를 하다가 쿠어계곡(Chur Valley)에서 찍은 사진에 보이는 李承晩의 모습은 이때의 그의 심경을 짐작하게 한다. 손에 부활절 달걀을 이한호의 부인 애니(Anni) 다리를 베고 누워 있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417 주릿히 근처 위틀리벨그 산을 관광하였다. 이한호 부부와 함께


418 오전에 李承晩을 태운 기차가 취리히역을 떠나올 때에는 이한호의 부인과 뮐러의 부인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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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는 이 부활절 외에도 몇 번 더 취리히에서 이승만박사를 맞이하여 돌본다.   

629일에 이승만박사는 파리를 떠나 제네바의 오텔 뤼시에 도착했다. 이튿날 그는 하와이로 타전하여 비자가 나왔다면서 여비를 부치라고 했다.
 74일에 이승만박사는 취리히로 가면서 다시 돈을 스위스의 어느 미국인 앞으로 부치라고 하와이로 타전했다. 취리히에서는 이한호 가까이의 개인 펜션에 묵으면서 이한호의 소련 비자를 기다렸으나 감감소식이었다.

77 아침에 이승만박사는  3등석 기차로 취리히를 떠나서 저녁 늦게 비엔나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날 그는 다시 하와이로 여비를 재촉하는 전보를 쳤고, 하와이로부터는 1주일만 기다리라는 답전이 왔다.   . . . .

725일에 이승만박사는 그곳을 떠나 센트 (St. Poelten) 거쳐 그날 저녁 1030분에 취리히에 도착했다.  …..  이한호 내외는 이승만박사가  편안하게 있도록 정성을 다했다. 이박사는 이한호 내외와 뮐러 내외와 같이 드라이브도 하고 아름다운 호수의 연례 불꽃놀이도 구경하면서 며칠 동안 쉬었다.  …..
그런 후에 다음  731 아침 745분에 마지막으로 이승만박사는 취리히를 떠나서 밀라노로 갔다. 그가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자 이한호 부인과 뮐러 부인은 소리 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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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사는 아래의 논문에 몇 곳을 수정 및 보충하여 인용한 것이다.

[출처]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類型 - 李承晩과 金九 (5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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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  기타 그의 활동

이한호박사는 국제스포츠와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1948년2월에 스위스 쌍트 모릿츠 (St. Moritz)에서 개최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회에 우리나라 선수단의 단장으로 참가한 일이다.  다음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서독총영사로 임명되어 활동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 경무청의 위임을 받아 한국 유도팀을 유럽에 친선차  방문 하는데  단장으로 인솔을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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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Wikipedia - [동계올림픽대회]가 2번 열린 쌍트 모릿츠 도시과 1948년대회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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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 Moritz 동계올림픽대회]에 선수단의 단장

1948년1월30일부터 2월8일까지 스위스 쌍트 모릿츠 (St. Moritz)에서 개최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회]에 처음 태극기를 들고 이 국제스포츠 대회에  한국 선수단이 참가하였는데 이때의 단장으로 인솔한 사람이 스위스에 거주한 이한호 박사이었다. 빙상/스케이팅 선수 3명과 훈련 감독 1명 및 통역겸 총무로1명 도합 6명의 미니 클럽이었다. 그러나 태극기를 들고 입장한 최초의 국제스포츠 행사인 것으로 한국에 큰 의의가 있었다. 아래의 개막식에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는 한국선수단을 보여주고 있다.

1948 Winter Olympic Game / www.stmoritz.ch/en/st-moritz/olympic-host-city 

St. Moritz (: 생모리츠) – 동계올림픽 2회 개최지 / www.stmoritz.ch/en 

  

70년 후인 2018년2월에 제23회 [동계올림픽대회]가 대한민국 강원도의 평창에서 개최 될 예정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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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최초로 휘날린 태극기’ 1948년 제5회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 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장하는 사진이 발견됐다. 김광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은 2일 성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보무 당당히 오륜회장에 유사 이래 처음 참가하는 역사적 순간’이라는 글귀와 이 대회에 참가한 이한호 (당시 스위스 취리히대 교수) 단장, 통역 겸 총무인 월터 정, 최용진 감독과 이종국 이효창 문동성 선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은 1948년 1월 30일부터 10일간 열려 그 동안 한국이 광복 후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로 알려진 1948년 7월 영국 런던 하계올림픽보다 앞선 것이다. 한국은 ‘COREE/KOREA’라는 이름을 내건 첫 국제대회인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서 노 메달에 그쳤지만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전 세계에 알렸다.   

자료 출처: 동아일보에서 / http://news.donga.com/3/all/20070703/8461658/1

 하늘엔 태극기… 가슴엔 ‘KOREA’  (동아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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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여 참가할 수 있었는가?

한국이 올림픽 첫 출전한 것으로 1948년 1월 30일 ~ 2월 8일까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 5회 동계 올림픽이다. 정부 수립보다 7개월 앞선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의 영문표기 코리아 KOREA/COREE를 앞세워 올림픽을 무대로 국제사회를 향해 ‘출신 신고’를 한 셈이다.  한국은  선수 4명 임원 2명을 파견하여 28개국 669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시 광북 한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2차 세계대전 승전국 미국의 군정 치하에 있었다. 정부 수립도 1948년8월15일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1947년6월2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47차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총회에서 50번째 회원국으로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이듬해 쌍트 로릿츠 동계올림픽 출전이 가능했다. 한국의 IOC 가입은 아시아에서 인도, 일본, 필립핀, 중국 (타이완), 스리랑카에 이어 여섯 번째 이다. 

한국이 IOC 회원국에 합류하게 된 과정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한국은 정부 수립 이전이라 IOC 가입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조선체육회 (당시는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정해지지 않아 조선으로 통용됐다.)  부회장 이상백, 민정장관 안재홍, 조선올림픽 위원회 총무 정상윤 등이 발 벗고 나서 재미동포 전경무를 올림픽 대책위 부위원장으로 영입하면서 물꼬를 텄다.

전경무는 1906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 길에 오른 부모룰 따라 태평양을 건넌 뒤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중북부 지방 명문 미시간대학 정치학과 재학 중 유색인 최초로 전미(全美) 대학웅변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대중 연설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활달한 성격에 사업 수완도 능했던 전 경부는 미국 백인 주류사회 ‘와스프 (WASP = White-Anglo-Saxon-Protestant/앵글로색슨계, 미국 신교도)를 말하며 흔히 미국 주류 지배계급을 뜻함)’ 인정하는 사교계의 멤버로 자리를 잡았다. 이를 바탕으로 탄탄한 인맥을 구축한 전경무는 전승국 미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던 IOC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전경무는 실제 IOC 부위원장이자 미국올림픽위원회 USOC 위원장이던 에이버리 부런디지 (A. Brundage)와도 친분을 쌓았다. IOC와 미국 내 스포츠 최고 실력자와의 돈독한 교분은 그를 신생독립국가이자 자신의 조국인 한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브런디지가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국사령관으로부터 USOC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전경무는 자연스레  미 군정 최고사령관 존 하지중장과도 ‘핫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하지 사령관은 사실상 남한의 최고 통치자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IOC 가입에 전경무가 전격 발탁된 것은 한국의 축복이자 행운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미 군정이 발급한 ‘제1호 KOREA 여권’의 주인인 바로 전경무다. 전경무는 조선체육회 부회장 겸 올림픽대책위원회 부회장 자격으로 부런디지를 필두로 자신의 국제 스포츠 인맥을 총동원해 한국의 IOC 가입을 성사시켰다. 한국외교사는 전경무의 이 같은 업적을 기려 ‘스포츠 외교의 첫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호사다마 (好事多魔 = 좋은 일에는 갖은 방해가 뒤따른다는 뜻)였을까 전경무는 IOC행에 필요한 모든 사전절차를 끝내고 가입신청서만을 품에 안은 채 스톡홀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비운의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그를 태운 미 군용 C-54 수송기가 김포 비행장을 떠나 일본 후지산 근처를 비행하던 중 추락해 탐승객 41명 전원이 숨지는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1947년5월29일 밤의 일이었다. 벼락을 맞은듯한 충격에 빠진 이상백을 비롯한 조선체육회 누뇌부는 부랴부랴 미국에 있던 독립운동가 이원순을 스톡홀름에 대리고 파견해 가입신청서를 제출했고 이는 그대로 IOC총회를 통과했다.  

이런 사연을 가슴에 묻고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태극마크를 처음으로 달고 출전한 국가대표는 남자 스피드스케이팅의 최용진 (500m, 1500m), 이종국 (1500m, 5000m), 이효창 (500m, 1500m, 5000m, 괄호 안은 출전종목) 단 3명이었다. 이 중 이효창은 1944년 全 일본선수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유망주였다. 그는 올림픽 개막 직전 현지에서 열린 친선경기 5000m와 1만m에서 1위에 오르며 금메달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최고 성적은 이효창이 기록한 19위였다  (1500m). 500m가 주종목인 문동성도 참가했으나 당일 컨디션 난조로 출전을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광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이 수년 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사진을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이 사진에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보무당당히 오륜장에 유사 이래 처음 참가하는 역사적 순간’이라는 글귀와 이 대회에 참가한 이한호 (당시 스위스 취리히대 교수) 단장, 통역 겸 총무인 월터 정 (재미 동포로 본명은 정범택), 최용진 감독과 이종국, 이효창, 문동성 선수의 이름이 적혀있다. 김부회장은 “1980년대 초 일본에서 생모리츠 올림픽 감독이었던 최용진씨에게서 이 사진을 받았다. 새모리츠 올림픽 때는 카메라가 거의 보급되지 않아 한국체육사에 귀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료: 한국을 빛낸 스포츠 영웅들 / http://pre.bookcube.com/epub.php?book_num=131202309

스포츠가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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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된 인물 언급

전경무((田耕武) ) – 애국장 수여 (95) / 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6920&i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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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순 (李元淳)  - 애국장 (91)  - 독립운동가 / http://knamf.org/%EC%9D%B4%EC%9B%90%EC%88%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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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정 (Walter Chung, 본명: 정범택/鄭凡澤  또는 성복/成福) –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자료 출처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090

 

에이버리 브런디지 (Avery Brundage, 1887 – 1975) – 미국의 운동선수, IOC 위원장

https://en.wikipedia.org/wiki/Avery_Brundage

 

존 하지 (John Reed Hodge, 1893 – 1963) – 군정최고사령관, 대장으로 퇴역

https://en.wikipedia.org/wiki/John_R._Hodge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 – 1964) – 미국군인으로 원수, 연합군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MacArth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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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Swiss Judo Asso. -  서독 Heuss 초대 대통령과 인사하는 이한호박사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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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서독 초대 총영사로 인명

1954년5월21일자로 서독 초대 총영사로 이한호박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독 정부측에서는 아직 한국에 총영사가 설치되지 않아서 무역대표부로 인정하고 사무소의 책임자에게 외교관 신분을 인정하여 주었다.   총영사관 건물 마련과 업무로 2년간 활동하였으며, 외무부에서 박대영 부영사를 후임자로 임명하자 그의 업무를 마치고 스위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안전을 위해 10년간 총영사관을 빌린 것이, 총영사관이 쾰른으로 옮기는 사정상의 이유로 임대관계가 잘 정리되지 않아서 언론에 좋지 않는 면으로 게재되여 유감스런 일이 생겼다.  (아래의 독문 참조)   

서독은 1954년 2월 12일 ‘한국에서의 독일 적십자병원에 의한 원조에 관한 협정’을 미국과 체결하고 야전병원을 부산에 설립, 의료봉사로 적극 원조하였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구호계획에 따라 47,619달러를 기부했다. 한국 전쟁의 휴전 후 한국은 총영사관 교환을 희망한데 대해 독일연방공화국은 상업 대표단의 교환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이견 속에, 1954년 10월 1일 한국은 독일 레마겐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초대 총영사 직은 이한호가 맡았다 (1954년 5월 20일~1956년 8월 2일). 독일 정부는 한국에 세운 총영사관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국무역대표단 (Koreanische Handelsvertretung)으로 승인(1955년 1월 22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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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5월21일에 [초대 서독총영사]에 임명되다.

初代西獨總領事 李漢浩氏를 任命. (경향신문. 1954년 5월 25일. 1면)

韓國과 獨逸聯邦共和國(西獨)이 外交關係를 맺는 最初의 措處로서 總領事를 交換하기로 兩國間에 合意를 보았다는 바 獨逸 「본」市에 駐在할 初代總領事로서 李漢浩 博士가 去二十一日字로 任命되었다하며 同氏에 對한 信任狀도 이미 發送되었다고 한다.

자료: 한독관계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8F%85_%EA%B4%80%EA%B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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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PLOMATEN - Der Bonner Ton

„Es war im Jahre 1954, als die Regierung der Republik (Süd-) Korea beschloß, diplomatische Fühler nach der Bundesrepublik auszustrecken und den damals 55jährigen Dr. Hanho Rhi zum Generalkonsul zu bestellen. Der Koreaner, der sich rühmt, dem koreanischen Staats-präsidenten Syngman Rhee verwandtschaftlich verbunden zu sein, hatte bis dahin im schweizerischen Appenzell Parfüms und Fleckenwasser mit wohlklingenden morgenländischen Namen produziert. Besser noch als in der Riechstoff-Branche war der athletisch gebaute Rhi jedoch unter den Anhängern des Judo-Sports bekannt: Er hatte es in dieser ostasiatischen Leibesübung schlechthin zur Vollendung gebracht und trug zum Zeichen dessen den Ehrengürtel des siebenten Dan, der höchsten Judo-Meisterwürde.

Dieser Judo-Meister und Dekan des sogenannten Dan-Kollegiums in der Schweiz erschien mit seiner Schweizer Frau Margrit, geborene Mökli, einem klapprigen Citroen und dem für Diplomatenwohnungen zuständigen Vertreter des Bundesministers für Wohnungsbau, dem ehemaligen Gendarmerie-Obersten Oehmler, auf Empfehlung des Auswärtigen Amtes in Remagen bei Bonn, um für die koreanische Vertretung eine Residenz zu mieten. Von Anfang an hatte es ihm die idyllisch gelegene Zehn-Zimmer-Villa "Haus auf Leims" angetan, die der Godesberger Ehefrau Lore Kollbach, geborene Felsch, 51, gehört.

Der alte Judo-Kämpe mit dem druckfeuchten Diplomatenpaß mietete denn auch diese Villa, die nach dem Kriege für den Flügeladjutanten des französischen Hohen Kommissars requiriert gewesen war, für monatlich tausend Mark teilmöbliert als Domizil des südkoreanischen Generalkonsulats.

Hanho Rhi schloß den Mietvertrag auf die Dauer von zehn Jahren ab. Hinzugefügt war eine, sogenannte Diplomatenklausel, wonach der Mieter vorzeitig kündigen dürfe, falls die Bundesregierung ihren Sitz verlegt.

Der koreanische Generalkonsul brachte es alsbald zustande, das Generalkonsulat ohne Wissen seiner Regierung von der Bundesrepublik als "Handelsvertretung der Republik Korea" bestätigen zu lassen, und der offiziöse Bonner "Diplomatische Kurier" feierte den koreanischen Repräsentanten in einem umfangreichen Interview. Als Autor des Interviews mit Hanho Rhi war in dem exklusiven Blatt der Bonner Hautevolee "H. Davids" angegeben, Rhis Sekretärin und enge Vertraute Hannelore Davids, 29, die später einen dänischen Handelsattaché in Bonn heiratete.

Nach zwei Jahren endete die diplomatische Karriere des Koreaners ebenso unvermittelt, wie sie begonnen hatte: Die koreanische Regierung beanstandete die Geschäftsführung ihres Bonner Repräsentanten, der es inzwischen zu einem fabrikneuen BMW gebracht hatte. Hanho Rhi zog es im Juli 1956 vor, in die Schweiz zurückzukehren.

Er kündigte den auf zehn Jahre abgeschlossenen Mietvertrag für sein Generalkonsulat mit der Begründung, die koreanische Regierung habe die Verlegung der Vertretung nach Hamburg angeordnet, was freilich nicht zutraf.

Rhis Amtsnachfolger, Vizekonsul Dai Young Park, amtierte noch einige Wochen in dem Remagener Klein-Korea, dann wurde die Dienststelle verlegt, aber nicht nach Hamburg, sondern nach Köln. Von dieser Verlegung erfuhr die Hauseigentümerin durch den Anruf einer Sekretärin der koreanischen Vertretung. Zwei Monate danach wurde das unbeaufsichtigte Grundstück der Besitzerin zurückgegeben. (Der Bonner Ton, Der Spiegel, 30. April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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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방 처음 유럽에 한국유도 선양

우리나라의 유도발전을 위하여 최초로  해외 원정경기를 주선하였다. 구체적 활동으로는1955년7월에 [스위스유도유단자] 회장을 역임할 [대한경찰상무회]의  원조로 약 3개월간 서유럽 6개국  스위스·오스트리아,·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서독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국제시합 순회지도로  한국유도를 서구에 소개하고 국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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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도가 처음으로 유럽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48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 나라는 독립 처음으로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이때 우리 선수단은 스위스에서 활동 중인 이한호 박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국내에서도 해방 통합 유도 연맹이 발족하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한호 박사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이한호 박사가 국내 유도계와 접촉한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1954, 이한호 박사는 한국 유도단을 유럽에 파견해 달라는 서신을 다시 대한유도회에 보냈다. 또한 1930년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한국의 유도 지도자들을 유럽에 파견해 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유도단 파견의 과정과 성과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 이사회는 즉시 회의를 소집해 유도단 파견과 관련한 모든 절차와 준비 과정을 의논했다. 우리는 우선 6·25전쟁으로 잃었던 유럽 진출의 기회를 다시 잡게 된 것에 기뻐했다.
“40년 한국 유도 사상 처음으로 유럽 유도계에 한국의 무풍(武風)을 떨치게 됐습니다.”
이번 기회에 유럽에 보급되어 있는 일본 유도보다 우수한 한국 유도 고유의 정신적인 면을 널리 알리고 옵시다.”
“한국과 유럽의 문화 교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때까지 한국 유도의 국제화는 거의 전무(全無)한 상태였다. 일본의 경우 강도관 유도의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의 노력으로 국제화에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었다. 가노 지고로는 강도관 유도를 외국에 전파하기 위해 외국인 수련자를 받아들여 그들을 가르쳤고, 그들이 외국에 나가 유도를 보급하도록 했다. 1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일본 강도관에 정식으로 입문한 외국인들은 한국, 영국, 미국, 중국, 인도,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온 사람들로, 그들은 각자의 나라로 귀국한 뒤 그 나라의 유도 개척자가 되어 활약했다. 또한 아시아 최초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었던 가노 지고로는 일본인 유도 지도자들을 외국에 파견해 유도의 기술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까지 보급하도록 했다. 그러한 연유로 유럽 각지에는 일본 유도가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유럽에서 한국 유도를 배우고 싶다고 연락을 것이다. 이는 매우 기쁜 일이었고, 대한유도회가 발족한 이래 진일보한 우리 유도의 위상을 증명할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자료출처: 선진경의 [나의 인생 나의 유도]

3장 <유도 사절단, 유럽 순회 지도 대장정에 나서다> 중에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18926729IN  / 석진경

"1957 40 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서독에 건너가 본에서 별세하였다."로 언급되고 있는데 [스위스연방정부 Archiv에 보관된 자료에 의하면 1960년9월18일 스위스 Schaffhausen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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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23 동계올림픽대회는 2018 2 9일부터 2 25일까지 대한민국의 평창에서 7개 종목의 15분야에 경기로 개최된다. / www.olympic.org/pyeongchang-2018 

 More:  www.eurasiatour.info/index.php/en/asia/260-olympic-winter-g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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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독일 제 대학교에서 수학하다 1968년11월7일부터 스위스 최대 도시 취리히 (독: Zuerich, 영: Zurich)로 와서 [취리히 주립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직장을 갖고 활동하였으며 2000년5월말로 정년이 되었다. 이 후에 반 소일로 온라인 관광 정보용 매거진 [EurAsiaTour Info / www.eurasiatour.info]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기간에 이한호박사에 대한 공적을 알면서, 조금 더 알리고 싶어서 이곳의 자료들을 보충해서 다음과 같이 3편으로 나누어서 기사 쓰고저 한다.

                                                                                                (Renewed:  2017.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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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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