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용 – 유럽의 첫박사

1921년 취리히대학서 박사학위 취득 – 유럽의 한인 첫 박사 – 100주년

Lee KwanYong (이관용 박사) –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위키백과에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다.
이 관용(1994-1933)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후에 구미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한자의 이름은 李灌溶, 李瓘鎔, 李鑵鎔, 李冠鎔, 李灌龍 등의 여러 가지 사용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보면 출생 년도가 1993년으로 된 것도 있고 또한 박사 취득도 1923년으로 되어있으며, 논문의 제목이 한글로만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취리히대학교의 등록 기록문]을 보게 되었는데 학위 통과의 정확한 일자로  1921년 8월 27일로 알게되었다.  똣이 있는 박사논문이기에 좀 더 언급을 하여 본다.
이전에 유럽에서 한국인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첨부된 이력서에 보면 출생 년도가 1893년이 아니고1894년으로 되어 있다.
그는 안타깝게도 사고로 일찍 사망하였지만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한국인이다. 즉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로서 활동을 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워원부의 부위원장으로, 1920년1월에 한국적십자사의 [구주위원장]으로 참가 등으로 활약했다.  
2008년에 [독립유공자]로 선정이되었다.  (위키백과에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다.)

이관용씨는 1917년에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University of Zurich)로 전학하여 수학을 한 후에 1921년8월27일에 Koreaner (한국인)로 유럽서 처음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유럽 유학은 1913년에 영국에 와서 옥스포드 대학서 시작하였으며 1917년에 스위스의 [취리히대학교]로 옮겨, 여러 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논문을 작성하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 www.matrikel.uzh.ch/active//static/1294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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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의 박사 획득 논문은 100년이 넘었으나, 주요한 뜻이 있는 논문으로 여기고 언급을 하여 본다. 원문제목과 취급한 순서와 문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Das Wollen, als Grundtatsache des Bewusstseins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 욕망론 )

Inhalt / 내용

I Einleitung / 서론

Der Gegenstand der Untersuchung

  1. Die gegenständliche Willenstheorie  – 1. Herbart, 2. Münsterberg                            3. Ebbinghaust
  2. Die emotionale Willenstheorie – 4,   Wundt
  3. Die conative Willenstheorie – 5. Jodl

Kritischer Überblick

II. Die experimentelle Untersuchung

Methodologisches und Versuchungsanordnung

A. Das Verhalten der Versuchungspersonen

B. Das Versuchungsergebnis

C. Die Angeben der Versuchungspersonen

D. Interpretation der Versuchungsergebnisse

III. Theoretische Betrachtungen

  1. Das unmittelbar Gegebene
  2. Das Hervortreten der subjektiven Lebensbestätigung im Bewusstsein
  3. Das Wollen als das Bewusstwerden der Lebensbestätigung des Ich
  4. Der Willensprozess als Entwicklungsprozess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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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eratur (문헌

Die Grundgedanken dieser Untersuchung hängen mit den philosophischen und psychologischen Vorlesungen von G. F. Lipps zusammen, ausserdem wurden benutzt:

  • Ach, Narziss Über die Willenstätigkeit und das Denken, 1905
  • — Willensakt und Temperament, 1909
  • — Über den Willensakt , eine Replik, 1910
  • — Der Wille, Handwörterbuch der Naturwissenschaft
  • Herbart, J. F. Lehrbuch zur Psychologie, herausg. von G. Hartenstein
  • Ebbinghaus, H. Psychologie in „System. Philosophie“ Sam. „Kultur der Gegenwart, 1913
  • Jodl, F. Lehrbuch der Psychologie, 4. Aufl., 1916
  • Lipps, G. F. Grundriss der Psychophysik, 3. Aufl. 1921
  • — Die psychischen Massmethoden, 1906
  • — Mythenbildung und Erkenntnis, 1907
  • — Weltanschauung und Bildungsideal, 1911
  • — Das Problem der Willensfreiheit, 2. Aufl., 1919
  • Münsterberg, H. Die Willenshandlung, 1888
  • Natorp, Paul Allgemeine Psychologie, 2. Aufl., 1910
  • Wundt, W. Grundzüge der physiol. Psychologie, 6. Aufl. 1908     
  • — Grundriss der Psychologie, 12. Aufl. 1914
  • — Essays, 2. Aufl. 1906
  • — Einleitung in die Psychologie, 3. Abdr., 1913
  • — Philosophische Studien, Bd. I und VI
  • Baldwin, J. M. Mental development in the child and in the race, 1896
  • Bergson, H. Introduction to metaphsics, transl. by T. E. Hume, 1913
  • Dessoir, M. Abriss einer Geschichte der Psychologie, 1911
  • Höffding, H. Esquisse d’une Psychologie, 4. Danoise, tr. Par Löon, 1900
  • Hume, D. Treatise on human nature
  • James, W. Principles of Psychology, II. Bde, 1839
  • — Pluralistic Universe, 1916
  • Külpe, O. Grundriss der Psychologie, 1893
  • — Lehre vom Willen in der neueren Psychologie, 1888
  • Lipps, Th. Leitfaden der Psychologie, 3. Aufl., 1909
  • Lotze, H. Mikrokosmos , III. Bd.
  • Mach, E Beiträge zur Analyse der Empfindung, 6. Aufl. 1911
  • McDugall, W. Psychology, Home University Library
  • — Introduction to social psychology, 13th, 1918
  • Paul, R. Psychologisches Vollpraktikum, 191
  • Pfänder, A. Das Bewusstsein des Wollens, Zeitschr. Für Psychologie, XVII.
  • — Phänomenologie des Willens, 1900
  • , J. Psychology, Encyclonaedia Britanica, 11th Bd. 1911
  • Wentscher, E. Der Wille, 1910
  • Windelbrand, W. Willensfreiheit, 2. Aufl.,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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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riculum vitae / 이력

Geboren 1893 in Seoul, Korea, erhielt ich, Kwanyong Lee, bis 1904 die allgemeine Erziehung zu Hause unter Privatlehrern und besuchte1905–1907 die Regierungs-schule zu Seoul und 1907-1910 die städtische Mittelschule zu Tokyo, Japan. Ich liess mich in die Juristische Akademie „PopHakKyo»  immatrikulieren in Japan 1910 und absolvierte dieselbe 1913.

1914-1916 studierte ich politische Geschichte an der Universität Oxford, wo ich die „Responsions“ und „Moderations“ bestanden habe. 1917 liess ich mich an der Universität Zürich immatrikulieren und hörte die Vorlesungen der Herrn Professoren Freytag, Lipps und Schlaginhaufen und der Herrn Privatdozenten Suter und Dürr.

1893년 한국 서울(Seoul)에서 태어난, 나, 이관용( Kwanyong)은 1904년까지 집에서 개인 교사로 일반 교육을 받았고, 1905년에서 1907년까지 서울에서 공립학교를 다녔으며, 1907년에서 1910 년까지 일본 Tokyo에서 시립중학교를 다녔다. 1910년에 [법학아카데미] (法学校)에 등록하였으며, 1913년에 동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14년-1916 년 사이 나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정치사]를 공부했으며 [Responsions]와 [Moderations ]에 합격했다. 1917년에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  등록학고 Freytag, Lipps, Schlaginhaufen 교수들과 Suter와 Duerr강사의 강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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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의 주제 (主題) – Aristoteles는 이미 순전히 심리학적으로 의욕의 본질을 결정했다. “그는 먼저 욕망의 순수한 관능적이고 이해가 많은 욕구의 본질을 구분을 했다.  이것은 항상 객관적인 내용 외에도 주관적인 외관(外觀) (즐겁거나 또는 불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느낌이 주어지며, 이는 느낌이 즉시 원하거나 또는 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에 대한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행위는 최종적으로 수용하는 것, 또는 그것에 반대해서 기대하는 것을 시야에 넣어서 예시화상(畵像)의 손에 발생하는 배려에 의해 중재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의 욕망의 경우 항상 닫혀 있다. 그러나 같은, 따라서 행동의 실제 욕망이 일(작품)에 직접 욕망을 넣는 힘의 확실성에 의해서 복합 될 때 주어진다. 행동 자체는 이제 운동으로 욕망의 전환을 통해 일어난다. 1)

그렇게 함으로써, Aristoteles는 의지가 인간의 역동적인 욕망의 표현을 무산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의지의 종래의 개념을 극복했다.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 한편으로는 욕망의 리더십에서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과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거나 생각할 때 주로 지적으로 의지를 취한다.

이 견해는 인간에서 식물성 (영양), 느낌, 욕구, 움직이는 힘으로 구성된 동물의 혼에 가해서 합리적인 (이성)을 나타낸다라는 유언이 이성의 본질에 속한다는 전제와 일치한다.  현대의 심리학에서도 의지의 개념은 다음의 짧은 위치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일반적으로 정신 생활의 개념에 의존한다.

의지의 현재 심리학의 수 많은 방향은 2 가지 주요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의지의 이질적인 이론은 우리들이 욕구, 열망,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장하지만 의식의 독특한 현상을 구성하지만 감각과 감정과 비교할 수 없는 품질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과 효과성은 일반적인 이유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의지가 결정된 “감각의 그룹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로 우리를 이끈다. 아이디어 또는 감정에서 의지의 과정, 정서적인 복합체에 활력을 아이디어,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과 감정에 더한 1차적인 경험을 보고 의지의 자기 유전학적 이론이 있다.   = = 

박사학위 논문 지도 교수: Prof. Dr. Gottlob F. Lipps (1865 – 1931)

Lipps 교수는 김나지움 을 Zweibruecken에서 다녔으며, 1883년에서 1887년까지 수학, 문리, 촐학 및 심리학을 Leipzig 대학의 W. Wundt교수 밑에서 그리고 다음은 Muenche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후에 1888년에 Leipzig대학 철학부로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Haegenau인문고등학교]와 1893년부터 1902년까지는 [Strassburg의 실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02년4월5일이후 Leipzig에 새로 설립된 [Koenigin-Carola-Gymnasium전문학교]에 수학 및 문리과목의 수석교사였다. 1904년에 [Leipzig대학]에서 Habilitation (대학교수자격증)를 받았으며 드디어 대학에 강사로서 강의를 했다. 1909년에서 1911년까지 Leipzig대학교 문리대의 철학과를 위한 부교수가 되었다. 그는 1911년에 Zuerich대학교에 철학과 및 교육학을 위한 정교수 겸직으로 심리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초빙되었다. 또한 그는 심리문리학과 함께 실험적 방법론을 취급했다.  / Lipps, Gottlob F. / www.paedagogik-feiert.uzh.ch/de/personenbiographien/lippsgottlobfriedrich.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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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의 제1장에 인용한 학자들의 간략한 공적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헤르바르트(Herbart, J. F., 1776-1841) – 독일의 교육자, 심리학자 : 북독 Niedersachsen주의 서쪽에 위치하는 Oldenburg에서 1776년5월4일에 태어나다.  12살까지 집에서 어머니로 가정교육을 받았다.  후에 예나(Jena)대학에서, 유명한 철학자 피흐테(Fichte) 밑에서 공부를 했다. 칸트(Kant)와 쉘린(Schelling)의 작품들을 읽었다. 당시 가정교사를 하고 있을 때,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찌의 학교를 방문하고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3년간 그리스어와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브레멘(Bremen)에 갔다. 1802년에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괴팅겐(Goettingen) 대학에서 강사로 철학 강의를 했으며(1805), 후에 원외 교수가 되었다. 1809년에 Kant가 취임해 있는 쾨니히베르크(Koenigberg)대학의 철학 및 교육학의 강좌에 교수로 초빙되어 1833년Goettingen대학에 초빙되기까지 24년간을 거처 대학에는 부설 교육학 세미나에 교사의 육성에 노력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학교참사관]으로 프로이쎈(Preussen) 왕국의 학교개혁 등에 종사했다. 1833년에 다시 Goettingen대학에 돌아와서 후에 학부장의 임무를 하게 되었는데 1837년에 [괘팅겐 대학 7인 교수사건]이 일어났는데, 항의한 교수들을 옹호되지 못함을 비난 받아 실의한 상태에 1841년에 사망했다. 묘소는 괴팅겐의 Albani-Friedhof에 있다.       

교육의 목적을 논리학에서, 방법은 심리학에서 추구해서 교육학을 체계화했다. 교육의 방법으로서 [관리], [교수], [훈련]의 3요소 [교육적 교수]를 제창해서, 교육의 목표는 경고한 도덕적 품성과 흥미의 다면성의 도야에 있다고 했다.  [국민학교]를 설립한 Pestalozzi, [유치원]을 설립한  Froebel (Friedrich W., 1782-1852)과 함께 Herbart]는 [중고등학교]의 설립자로 현대 교육제도를 설립한 세계 3대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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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베르크(Muensterberg, Hugo, 1863–1916) – 독일계 미국인 심리학자 :  Muensterberg는 당시 [독일령]인 Danzig (현재 폴란드의 Gdansk)에서 1863년6월1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목재를 사서 영국에 파는 무역상을 운영했다. 모친은 예술가였으나, 4명의 아들을 키우면서 일을 계속했다. Hugo의 심리이론의 형성에는 예술적 환경도 영향을 받았다고 여긴다. 김나지움을 1882년에 졸업한 후. Leipzig대학의 분트(W. Wund)t 교수에서 심리학을 배웠다. 후에 Heidelberg대학에서 의학을 수업했다. 1887년부터 Freiburg대학에 강사로 근무했으며 1891년에 교수로 승진되었다. 사생활로서는 1887년8월7일에 슈트라우스 출신의 Selma Oppler와 결혼했다.

1891년에 개최된 제1회 [국제심리학회의]에 출석해서 제임스(W. James)교수를 만났다. 그의 초청에 의해서 1892년부터 3년가의 약속으로 Harvard대학 심리학강좌의 교수로 임한다. 1895년에 일단 Freiburg로 돌아 왔으나, 1897년부터 다시, 새로 창설된 응용심리학강좌의 교수로 Harvard대학에 복귀한다. 1898년에 [미국심리학회의 회장]에 선출된다. 1910년에 Harvard대학의 교환교수로 Berlin대학에 파견된다. 1916년 Harvard의 강의 중에 급사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고향의 독일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미국 지지자로 공격을 받은 경우도 있다.     

산업심리학 (産業心理学) : 1913년의 저서 [심리학과 산업효률]에 있어서, 심리적 사회적 요인이 노동 효률에 주는 영향이란 관점에서 고찰했다. 광고의 효과에 있어서도 분석하고, 경제심리학의 장래의 발전을 준비했다.                    

임상심리학 (臨床心理学) : Muensterberg는 모든 심리적 과정에는 대응하는 뇌의 프로세즈가 있으며, 심리학적 병행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신질환에는 심리학적 원인이 있으며, 행동관찰을 환자와 면접에 기초해서 진단이 된다. 이런 고찰을 기본으로 Muensterberg는 1909년 [심리요법]이란 제목의 책을 썼다. 

응용심리학 (応用心理学) : Muensterber는 재판에의 심리적 정보의 응용에 대해서도 몇 편의 논문을 썼다. 이런 논문의 많은 주요 대상은 목격 증인의 신뢰성에 관하는 것이다. 1908년 발표의 [증인의 입장에서]는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심리적 요인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인데 넓은 논쟁을 불렀다. 

예술심리학 (芸術心理学) : 1915년경부터, 당시까지 새로웠던 영화의 분석에 흥미를 갖고. [극영화] (1916년)에 있어서 영화가 갖는 대중에 영향력을 평가함과 동시에 지각심리상의 착각이 영화의 예술을 보증한다고 했다.      = = =

에빙하우스(Ebbinghaus, Hermann, 1850-1909) – 독일의 심리학자 : 기억(Gedaechtnis)에 관하는 실험적 연구의 선구자로 [망각곡선](忘却曲線)과 간격효과(間隔效果)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의 심리학자이다. 처음으로 학습곡선에 언급한 인물로 반복학습의 분산효과를 발견하다.

Ebbinghaus는 1850년에 프로이쎈(Preussen)왕극의 라인(Rhein)주 바르멘(Barmen, 오늘날 Wuppertal시 한 구역)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떼 루터파를 신앙하는 도시의 김나지움(Gymnasium)의 생도였다. 17세 때(1867년) Bonn대학에 입학해서 여기서 역사와 언어학을 공부하려 했는데, 철학에 흥미를 가졌다. 1870년에 [보불 전쟁]으로 연구를 일시 중단했다. 1873년에 철학에 대한 논문을 써서 23세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서 3년간은 Halle/Saale와 Berlin에서 생활했다.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후에, Ebbinghaus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가정교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런던의 고서점에서 페흐너(Gustav Fechner)의 저서 [정신물리학요강] (Elemente der Psychophysik)를 접해서 여기에 감화되어 그는 유명한 [기억실험]을 하게 되었다. Berlin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한 그는 독일의 3번째로 즉 분트(Wilhelm Wundt)와 뮐러(Georg E. Mueller) 다음으로 [심리실험연구소]를 설립해서 1879년부터 자기의 기억연구를 시작하다. 1885년에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Ueber das Gedaechnis Untersuchungen zur experimentellen Psychologie] (기억에 대해서, 실험심리학의 공헌)가 출판되었다. 이 출판물의 공적은 대단히 커서 그는 Berlin대학의 교수로 초빙 되었다. 1894년에 논문 부족으로 Berlin대학 철학부장 승진에 누락되자 Ebbinghaus는 브레슬라우 (Breslau)대학 (현재 폴란드의 Wroclau대학)으로 옮긴다. Breslau에 있는 동안, 그는 아이들의 정신능력이 학교의 수업 날에 얼마나 저하하는가를 연구하는 위원회에 종사했다. 또 그는 Breslau에도 심리실험연구소를 설립했다.

1902년에 Ebbinghaus는 다음의 서적 [Die Grundzuege der Psychologie](심리학의 원칙)를 출판했다. 이 것은 곧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사후에도 호평이 계속 이어졌다. 1904년에 Halle로 돌아와서 그의 인생의 만년이 되는 수년간을 여기서 보냈다. 1908년에 최후의 출판물 [Abriss der Psychologie] (심리학의 개요)가 출판되었다. 이것도 높은 평가가 계속해서 8판의 증쇄가 되기까지 되었다. 이 간행 후에 얼마 되지 않아 1909년2월26일 Ebbinghaus는 폐렴에 의해서 59세로 사망했다.    = = =

뷘트 (Wundt, Wilhelm Maximilian, 1832-1920)  – 독일의 심리학자, 철학자 : Wundt는 1832년8월16일에 남독 바덴 지방의 Neckarau (Mannheim근처)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할아버지 Peter Wundt (1742-1805)는 Wieblingen의 지리학교수이며 목사이었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다.  Wundt는 12살에 Tuebingen대학에 입학한다. 고교시절에는 낙제 해서 전교를 할 정도 공부를 싫어했으나 Heidelberg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후부터 맹렬히 공부를 했다. 1857년에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1858년부터 5년간 헬름홀쯔 (Helmholtz, Hermann von, 1821-1894 독일 생리학자 및 문리학자)의 조수로 일했다.

1862년부터 강사로 [자연과학에서 본 심리학], [생리학적 심리학] 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담당했다. 1873년에 [생리학적 심리학 강요]의 전반을 출판했다. 다음해 1874년에 스위스 Zurich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1875년에는 Leipzig대학의 철학교수로 초빙되었다. 이제까지의 철학적인 심리학과 다른 실증적인 심리학을 구상해서 [실험심리학] 최초의 책인 [감각 지각설/知覺說 공헌] (1858-1862)를 저서, Leipzig대학의 철학교수를 근무하는 1879년에는 세계에서 아주 초기의 실험심리학의 연구실을 운용했다고 하며, 심리학사의 많은 곳에서는 이 때를 [새로운 학문분야로서의 심리학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 실험실에는 유럽, 미국, 일본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1881년에는 [철학연구]라는 이름의 책자를 발간했으며, 이것은 후에 [심리학연구 / Psychologische Studien]로 개칭해서 계속된다. Wundt 의 심리학 연구실의 성과를 중심해서 여러 논문을 게재하고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Wundt실험실이 있는 Leipzig이외의 곳으로 옮가지 않고 그 곳에서 88세로 사망했다. 그는 생애에 많은 저작을 했다. 또한 그를 [실험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 = =  

요들 (Jodl, Friedrich, 1849-1914) – 독일의 철학자 심리학자 : Jodl은 바이에른 왕국의 많은 고관들이 임명된 왕실에 가깝운 뮌헨의 가족협회서 자랐다. 가족의 친구인 화가 뷔르켈 (Heinrich Buerkel)는 Jodl의 어린 시절부터 시각예술에 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Friedrich의 성향은 음악에 관하는 것이었다.  요들은 1867년에 Muenchen에서 역사와 미술사, 특히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학술적 교사 중에 철학자 Carl von Prantl, Johann Huber 및 Moritz Carrière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872년에 David  Hume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칭호를 취득했다. 그 후에 Jodl은 뮌헨의 [바이에른 전쟁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이어 그가 철학과를 위한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1885년에 [프라하의 독일대학]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비엔나대학 철학을 위한 강의를 맡았으며, [비엔나 공과대학]에서는 미학을 가르쳤다.       

그의 학술적인 업무 외에 Jodl은 [비엔나 국민교육협회]의 회장으로 또한 과학적 지식의 보급과 대중화를 위한 강사로 활동을 하였다.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에 속한 [양성주의]의 대표자로서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초 몬타니즘]에 맞서 싸웠고, 과학의 자유와 종파,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로마-카토릭교회의 공립학교제도의 영향에 반대한 캠페인을 행하였다. 그는 자유 종교 [독일윤리문화협회]의 공동 창설자였으며, 무엇보다도 종교적 수업 대신으로 비고백의 도덕적 수업을 받은 의무적인 주립학교를 홍보하였다.       

Jodl은 결혼을 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Roten Wien] 시기에 대중교육에 대한 그의 봉사를 인정받아, 그의 이름을 떠서 1919년에 Hietzing에 [Jodlgasse] 그리고 1926년에는 Doebling시의 주거단지에 [Jodl-Hof]라 명명되었다. 또한 Friedrich요들에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비엔나대학 명예의 궁정에는 (비엔나의 조각가 Hans Mauer가 만든) 초상화의 흉상이 세워졌다.  

Jodl의 제자로 작가 Stefan Zweig (1881-1942)는 히폴리테 타인 (Hippolyte Taine, 1828-1893)의 철학에 관한 연구로 1904년에 Jodl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후에 알려진 다른 박사과정의 학생으로 오또(Otto Weininger, 1880-1903) 및 프리덴(Egon Friedel, 1878-1938)등이 있다. / https://de.wikipedia.org/wiki/Friedrich_Jodl

이상의 학자들에 대한 간략한 공적에 대한 자료는 Wikipedia에서 참고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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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 박사와 그의 논문에 대한 [철학회연구회]의 논평이 아래와 같이 간단히 언급이 된 것이 있다. 정확한  논평이었는지 한번 검토하여 볼만 하다.

백종현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0 (개정판), pp. 45/46

초기 해외 유학생들에 의한 독일철학 유입 (1921-1929)

우리나라 사람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처음 사람들은 모두 독일어 지역에서 수학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학박사인 이관용(李灌溶, ?-1933)은 1921년 스위스의 [취리히(Zuerich) 대학]에서 립스 (F. G. Lipps)교수의 지도를 받아 [意慾論 – 意識의 根本事實로서]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김두헌, „故 李灌溶博士 -意慾論 – 意識의 根本事實로서 – „ [철학] 제2호, 철학연구회 편, 1934년, 철학연구회 편, 1934년, 130면 이하 참조 )

이 논문에서 이관용은 근대 심리학의 주류이던 지(知), 정(情), 의(意)의 3분 능력설 (三分 能力說)을 반박하고 의식의 근본사실을 의욕에서 보려 하였다. 의식은 물론 知-情-意 3요소의 서로 떨레야 떨 수 없는 순환 활동이겠지만, 의식의 자발성 곧 자아의 능동성의 근거는 다름 아닌 애씀의 양상인 의욕에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의욕이 知-情-意 3요소의 궁극적인 바탕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을 그는 ‚실험적인 연구‘와 ‚이론적인 고찰을 통하여 입증하려 하였다.

학위 취득 후 이관용은 바로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논리학심리학철학개론 등을 가르쳤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에 „사회의 병적 현상“이라는 글을 연재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사회 유기체론을 피력하였으며, 당시 독일 철학계의 한 기둥이었던 오이켄 (K. Eucken, 1846-1926)의 신관념론 (Neuidealismus)과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부흥의 흐름을 타던 헤겔 (G. F. W. Hegel, 1770-1831) 철학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철학회 편, [한국철학사] 하권, 40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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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laisNations    c)WikipediaPic. – 1920년 창설된 [국제연맹]의 스위스 즈네브 본부 사무국   

[이관용]에 대해서 Wikipedia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이관용](李灌鎔, 1894년-1933년)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한국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도 참여했으며 구미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은 이관용(李灌溶,  李瓘鎔, 李鑵鎔, 李冠鎔, 李灌龍)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생애 –  자작(子爵) 이재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립 한성학교 (官立漢城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동경부립 제4중학교 (東京府立 第四中學校)에 입학했다. 그러나 동 중학교도 중퇴하고 말았다. 그 뒤 조선에 돌아와 경성전수학교에 편입, 1913년 3월 경성전수학교 (京城專修學校)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3월  옥스퍼드 대학 (University of Oxford)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16년에 스위스의 [취리히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초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와 1919년 4월에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에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조직하고 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7월 17일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 조소앙과 한국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요구안’을 제출하였고, 이후 8월부터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하다 1919년 9월에 파리위원부와 한인위원회가 통합되어 구미외교위원부가 되자 구미외교위원회 주불대표부의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10일에 사임하였다.

그러나 1920년 1월에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 (大韓赤十字社 歐洲支部長)으로 스위스의 국제적십자회 (國際赤十字會)에 참석하여 일본정부 적십자사 (赤十字社)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였고, 동년 10월 12일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하였다. . . .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3년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을 견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활동 중 동아일보에 입사, 신문기자가 되고, 1923년 5월부터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강의를 했다.

1925년 2월에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출국,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3월부터 동아일보 유럽 특파원으로 러시아, 유럽에서 취재활동을 하였고, 1925년 7월에 베를린대학 재학 중인 동생 이운용 (李沄鎔)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다. 조선총독부 정탐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에 돌아오는 도중 상하이 (上海)에 들러 기호파 독립운동가인 이시영 (李始榮) 등과 회견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월 신간회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후 신간회의 간사로 활동하다가 1929년 10월 광주학생사건과 관련해 신간회 간부들과 같은 해 12월 일제 관헌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개최코자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1932년 1월 22일 가출옥(假出獄) 되었으며, 1933년 8월 14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익사(溺死)하였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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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의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제1차대전이 종결되고 1919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일정이 확정되자 미국과 중국의 한인들은 [파리평화회으]에 대표를 파견하려 시도했다. 미주 [대한인 국민회]는 이승만, 민창호, 정한경을 대표로 선정했고, 이들은 파리행 여권을 구하려 시도하는 한편 외교청원운동을 시작했다. 처음 1918년11월25일 [대한인 국민회] 대표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이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다. 아직 하와이에서 건너오지 않은 이승만 대신 정한경이 주도한 이 서한에서 이들은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민족자력에 대해 거중조정을 해달라고 청원했다. 정한경은 1918년12월10일 미 상원에, 이승만은 1919년2월25일 윌슨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에 동일한 서한을 발송했다.

중국 상해의 한인들은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했다. 김규식은 1919년2월1일 상해를 떠나 3월13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블라베(Blavet)라는 시인부부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타이피스트, 통역을 구하여, 1919년4월 [파리위원부]를 설치했다.여기에 선전홍보를 위해 통신국(Bureau d’Information Coréen)을 병설하였다.

파리위원부에는 5월초에 상해에서 온 김탕(金湯), 5월18일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재학 중인 이관용(李灌鎔)이 동참했고, 6월3일 제1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지원병 황기환(黃玘煥)이 독일에서 찾아왔다. 또한 6월에는 조소앙, 7월초에는 여운홍이 상해에서 파리에 도착했으며, 이후 연해주에서 국민의회 대표로 윤해와 고창일이 합류했다.

이들은 김규식을 보좌하며 평화회의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다. 한편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4월 13일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의 대한민국위원 및 [주 파리위원부]의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는 바로 이 건물에 입주하여 여러 외교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리 강화회의가 끝난 뒤 1919년 8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김탕과 여운홍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이관용과 황기환이 위원장 직무를 대리하면서 1921년 7월 황기환이 도미할 때까지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자유한국》 등의 선전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여러 국제회의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파리위원부]는 1919년 4월 출범 당시 샤토덩거리 38번지(38, Rue de Chateaudun)에 본부를 두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는 1920년 중반 이후에는 비엔나 거리 13번지(13, Rue de Vienne)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한국》(1920년 8ㆍ9월호 이후)과 『구주의 우리 사업』 발간처 주소는 이곳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지번 일대는 그 동안 재건축이 이루어져 당시건물의 원형은 찾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가 들어 있던 건물은 시내 중심가에 있다. 파리 예술의 전당인 국립오페라극장 북쪽, 성 라자르역 동쪽으로 서너 블록 떨어진 십자로 옆에 자리 잡은 7층 석조 건물이다. 지층 1층과 맨 위에 증축한 7층은 근래 수리하여 원형을 잃었으나, 나머지 6층은 회홍색의 석조로 된 고색창연한 건물로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프랑스 보험연합회사가 건물 1층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잡화를 파는 슈퍼마켓(가게명 : FRANPRIX)이 들어서 있다. 건너편에는 [윌슨 호텔 Wilson Hotel]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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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평화회의 이와 연관된 {국제연맹} 대해서

파리평화회의 (Paris Peace Conference) (Paris Peace Conference, 1919–1920) :   베르사이유평화회의 (Versailles Peace Conference)라고 불리는 [파리평회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World War I, July 28th 1914 – Nov. 11th 1918)의 종결 후의 승리한  연합국(Allied Powers)의 회의로 패배한 중심국(Central Powers)의 평화조약을 설졍했다. 32개국의 국적을 가진 외교관을 포함한 주요한 또는 주요 결정은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의 창설과 패배한 국가들의 5개 평화조약이다. 독일과 오토만제국의 해외소유물을 [위임장]()으로 수여한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 수여한다. 독일에 과한 배상, 민족의 경계를 더욱 반영하기 위해서 새로운 국경의 묘획(描劃)(때로는 plebiscites를 수반) 주 결과는 독일과의 [베르사이유조약]으로, 제231조에는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에 대한 전쟁에 대하는 죄악감을 표시했다.] 이 조항은 독일에 있어서 굴욕적이었으며, 독일이 지불하는 것을 의도한 막대한 배상금을 설정했다 (1931년에 배상이 완료하기 전에 일부만 지불하지 않았다). 주요 5개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및 미국)이 회의를 지배했다. 그래서 Big Four는 프랑스 수상 조르쥬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 영국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및 이탈리아 수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Vittorio Emanuele Orlando)이었다.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145회 함께 모여서 모든 주요한 결정을 차례 차례로 다른 사람에 의해 비준을 시켰다. 회의는1919년1월18일에 시작했다.

[파리평화회의]에서는 5가지의 주요한 평화조약이 작성되었다. 괄효 안에는영향을 받은 나라 언급)

베르사유 (Versailles) 조약: 1919년6월2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제1차세계대전후의 국제관계를 확정한 목적으로 31개 연합국과 독일Germany 사이

생제르맹 (Saint-Germain) 조약: 1919년9월10일에 체결된 것으로 목적은 제1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평화 정착의 목적으로 연합국과 오스트리아Austria간의 조약

뇌이쉬르센 (Neuilly-sur-Seine) 조약: 1919년11월27일 체결한 조약으로 제1차세계대전 전승국과 불가리아 Bulgaria간의 세르보-크로아치아-슬로벤의 독립인정 Bulgaria)

트리아농 (Trianon) 조약: 1920년6월4일 체결한 조약으로 베르사유 궁전 내의 트리아농 궁전에서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 문제처리를 목적으로 연합국과 헝가리/Hungary)간의 조약

세브르 (Sevres) 조약: 1920년8월10일에 체결된 것으로 제1차세계대전을 끝내고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연합국과 오스만푸릌크/ Ottoman Turkey간의 조약

(이상의 5곳은 파리 근교에 위치하는 소도시들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Peace_Conference,_1919–1920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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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은 제1차세계대전 후의 1919년의 협상국과 독일의 베르사유조약, 모든 동맹국 과의 제 강화조약에 의해 규정되어 [베르사유조약의 발효일인 1920년1월10일에 정식으로 발족한 국제기구이다. 연맹으로서 처음 회합은 1920년1월16일에 프랑스 파리서, 제1회 총회는 1920년11월15일에 스위스 즈네브에서 개최되었다. 연맹본부는 1920년부터 1936년까지는 스위스 즈네브의 [Palais Wilson]에서, 1936년부터는 같은 즈네브의 [Palace of Nations]에 설치되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활동정지 상태가 이어졌으나, 1946년4월20일을 기해서 정식으로 해산되었으며, 그의 자산와 역할은 1945년10월24일에 51개국의 본래의 가맹국에 의해서 설립된 [국제연합 / Unites Nations = UN]에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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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2008년에 보훈처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이관용의 유럽과 귀국 후에 독립운동 활동의 공적을 위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하였다.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 내용]애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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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 (1894.7.15 – 1933.8.13, 출생지: 서울)

운동계열: 국내 항일 / 훈격연도: 애국장 (2008)

공적 내용 :  이관용은 1913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후 유학 길에 올라 1914년 3월, 영국 옥스퍼드대학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16년 스위스대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파리에 파견되었다. 7월 17일, 국제사회주의자회의인 루체른 회의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서신을 대회 의장에게 발송하였다. 이로써 조소앙과 한국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현재 상황과 독립의 필요성 등에 대해 설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한국독립승인요구안’을 제출하였다. 8월 9일, 김규식의 뒤를 이어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으로 스위스의 국제적십자회에 참석하여 일본 적십자사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였으며, 10월 12일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하였다. 1921년 6월 20일 임시정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조국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있던 그를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관용은 고국을 떠난 지 10년만에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3년 2월 17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1923년 5월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1일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발기회](少年斥候團朝鮮總聯盟發起會)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0월경 [조선기근구제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태평양문제연구회] (太平洋問題硏究會)를 조직하고 종교·경제·이민·외교문제를 연구하며, 하와이 [범태평양회의]에 상주위원을 파견할 것을 협의하였다. 11월 30일, 사회 각 방면에 종사하는 여러 유지가 [조선사정조사연구회]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한국의 사회·가정 및 상업·공업·농업·재정과 금융·법제·교육 문제 등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하였다. 1926년 [시대일보] 부사장이 되어 언론운동을 하였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간사로 활동하였다. 12월경, 신간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임시집행부 서기장에 선임되었으며, 12월 10일 [재만동포옹호동맹] 집행위원회에서 홍명희(洪命熹)·김기전(金起田)과 함께 성명서 작성위원이 되었다. 1928년 6월 15일 [조선교육협회] 정기총회에서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9년 2월경, [조선일보] 남경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북만조선농민개척사](北滿朝鮮農民開拓社)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귀국 후,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신간회 간부들과 동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고자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이관용은 1931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1932년 1월 22일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철학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 8월 13일 함북 청진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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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가문에서 출생  – 이재곤의 3

이관용의 부친 이재곤은 어떤 분인가?

이재곤 (李載崑 또는 李載崐, 1859년4월8일(음력3월6일) – 1943년7월11일)은   조선말기의 왕족이자 정치인,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정미 7적]의 한 사람이며,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독립운동가인 이관용은 그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본관은 전주, 본적은 경성부종로이며, 아호는 동원(東園)이다.

본관은 전주로, 고종과는 같은 항렬의 왕실 종친이다. 흥완군 이정응에게 입적된 완순군 이재완의 친동생이다.[1]

경기도 양주군에서 이신응(李愼應)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0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벼슬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와 지방의 현감 등을 거쳤다.

1896년 비서원경, 1898년 종정원경, 1902년 회계원경 등을 지내며 점차 고위직에 올랐다.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 때는 학부대신으로서 공을 세웠고,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 받았다.

이후 [신사회], [대동학회], [대한여자흥학회], [한자통일회], [국민연설회] 등의 각종 친일 단체에서 임원을 맡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살해되었을 때는 [한자통일회] 지회장으로서 한자통일회] 이등박문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도 임명되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후에는 불교계와 왕실을 중심으로 꾸준한 친일 활동을 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하여 조직된 불교 종단인 [삼십본산] 연합사무소 고문을 맡았으며, 1917년에는 [불교옹호회] 고문도 역임했다.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 축하를 위한 행사가 경성신사에서 열렸을 때 참석했고, 1917년 [순종]이 일본 황실 참배를 갈 때 수행했다.

3·1 운동 때 권중현과 함께 작위를 반납할 의사를 표시했으나 일본 정부로부터 거절당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광나루에 별장을 갖고 있을 만큼 호화롭게 살았고, 1960년 보도에 따르면 자손들도 서울 중구 세종로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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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활동항 강점기의 유명 Koreaner로 이한호박사를 소개한다.  :  Rhi Hanho  (이한호) – 독립운동가 및 스포츠 외교가 (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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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zsong@bluewin.ch / www.eurasiatour.info

Facebook (Ziyul Song) / www.facebook.com/ziyul.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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