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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enburg 주 – Fontane의활동지

Fontane 200 – 2019년은 출생 200주년

폰타네 (Heinrich Theodor Fontane)는 1819년 12월 30일에 현제 Brandenburg 주의 Neuruppin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독일의 작가, 소설가 및 시인이며 약제사였다. 그는 프로이쎈Preussen 문학의 거울이며 또한 주요한 독일의 리얼리즘 (Realismus)을 대표하는 주요한 작가이었다.

금년 12월30일은 그의 출생 200주년이 된다. 이를 기념해서 그의 고향과 그와 연관이 있는 몇 곳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다행으로 여긴다. 출생지의 [주 관광국]와 [독일관광국 취리히사무소]의 지원으로 다음의 프로그램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협조에 감사히 여긴다.

Brandenburg Tourist Information  /  www.brandenburg-tourism.com                German Travel Bureau Zurich / www.germany.travel

2019년 9월 23일 10시부터 시작하는 투어를 위해서 22일에 주도 포츠담에 먼저 와서 1박을 하였다. 투숙한 호텔은 [Hotel am Großen Waisenhaus]로 편리한 호텔이었다. / www.hotelwaisenhaus.de/en. 이 날은 자유시간이 허락되어 추천한 [Pfingstberg, www.pfingstberg.de]를 방문하여 좋은 전망을 보았고, 오후 늦게는 시내의 활기찬 분위기를 보면서 사진을 찧었다.

브란덴부르크 주의 수도인 Potsdam은 Theodor Fontane의 [Mark Brandenburg 지방의 산책] 중에 Havel강의 아름다움을 인상적으로 써서 남기고 있다. [Havel강의 증기선 여행]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 www.potsdam-tourism.com

Potsdam에는 대학에 속하는Fontane Archiv. www.fontanearchiv.de/startseite.html]가 있다. 책임자인 Dr. Peter Trilcke교수이다. Fontane의 작품 수집 및 보관으로 최대이며 그의 작품에 관심 있는 학자들의 연구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다. / www.fontane.de/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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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ane5       © Z. Song – 다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Schloss Ribbeck]의 멋진 모습

본인의 프레스 투어를 위해서 3발4일간 자동차편으로 수행한 가이드는 [브란덴부르크 관광국]의 Regina Zibell 담당자로 아주 편리하고 유익한 수행을 하여 주었다.

11시경에 위에 언급한 가이드의 수행으로 약 100km 떨어진 도시 [Ribbeck, www.ribbeck-havelland.de]를 방문하였다. 옆의 도시 Nauen의 [야간 순찰 원]인 Wolfgang Wiech씨가 옛 유니폼을 입고 와서 반시간 정도 안내 설명을 해주었다. [Schloss Ribbeck]의 뜰에는 Fontane의 시와 통일을 상징해서 16주의 다양한 [배나무]를 심어 기념하고 있다. 점심식사는 특이하게 [옛 Ribbeck 소학교건물]을 이용해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간단히 하였다.

14시반부터 결혼식 연회와 연주회 등 다목적으로 이용되는 [Schloss Ribbeck, www.schlossribbeck.de]에 설치된 Fontane에 관한 전시장을 돌아 본 후에 이 곳에서 마련한 차와 케이크의 기억에 남는 접대를 받았다.

16시경 이곳에서 약 60km 떨어진 Fontane의 출생지이고 대학도시인 노이루핀 [Neuruppin, www.neuruppin.de]로 이동했다. 2박 투숙할 호텔은 호반에 위치한 아주 좋은 호텔이었다. 즉 [Resort Mark Brandenburg, www.resort-mark-brandenburg.de]로 [Fontane Therme] 이름을 가진 온천장 시설도 있었다. 만찬은 19시경부터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Altes Kasino, https://hotel-altes-kasino.de] 호텔에 속한 레스토랑에서 [Fontane Menue]을 즐겼다. 이를 운영하는 젊은 Max Golde씨로 메뉴와 운영 사업체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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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9월24일은 10시부터 시내관광을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좋은 설명을 들었다. Fontane는 이곳 고향의 Neuruppin의 [Friedrich Wilhelm Gymnasium] 고등학교에 1832년부터 1833년까지 다녔다고 한다. 이어서 [Fontane Museum, www.museum-neuruppin.de]에 들여서 전시장을 돌아보고 자료를 얻었다. 작가 Fontane 출생 200주년을 위한 3월30일의 전시회 개막식에 연방정부 대통령 부부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Kunstraum Neuruppin, https://fontane-200.de/de/kunstraum-neuruppin]

14시경 근처 마을 Karwe를 들여서 [Krafft von dem Knesebeck 자작/ 子爵]의 소유 건축물에 2019년10월15일까지 전시하는 Fontane에 대한 주요한 고서古書, 신문 원본과 저작 품을 연로한 자작 님의 직접 설명으로 들으며 관람했다. / https://fontane-200.de/de/fontane-trifft-knesebeck

방문 후에 호텔로 돌아와서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호텔의 온천 시설을 돌아 보고 싸우나를 했다 (www.resort-mark-brandenburg.de/fontane-therme). 오늘의 저녁식사는 호텔 근처에 위치하는 와인 전문점 [Weinhaus, https://weinhaus-neuruppin.de]을 겸하는 레스토랑에서 좋은 와인을 시음하면서 고장 전통 메뉴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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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5일은 호텔을 9시반경에 출발해서 [Neuglobsow. www.neuglobsow.de]에 갔다. 도착해서 시내를 산책하면서 마을의 분위기를 본 후에 가이드의 안내로 Fontane의 [Stechlin 호반, www.stechlin.de]를 소재로 만든 시의 낭독과 이 호수의 특이한 점을 설명 들었다. 12시경 7대를 이어서 운영하고 있는 어부 Boettcher 가족의 활동 현황에 대해서 설명을 들으면서 훈제를 한 생선요리를 시식했다.

13시 반경에 Rheinsberg (www.rheinsberg.de)에 와서 먼저 이 곳의 유명한 궁성 [Schloss Rheinsberg] (www.spsg.de)을 방문하였다. 성 안에 있는 전시장을 돌보았다. 이 성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황태자로서 1736년부터 1740년까지 거처했다. 궁성극장에는 1991년에 [Musikakademie Rheinsberg]를 창설되었으며, 매년 음악회가 개최되고 있다. 이후에 성 근처에 위치하는 투숙할 호텔에 체크인 했다. Gasthof Endler www.gasthof-endler.de

15시 이후에 [Kurt-Tucholsky Literaturmuseum, www.tucholsky-museum.de]의 Boethig관장이 Fontane와 Rheinsberg성에 대해서 보충 설명을 들었다. 다음에 Rheinsberg 관광안내소에 들여서 잠시 정보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직원이 가이드 하는 시내의 일 부를 돌아보았다. „Fontane도 그의 여행 루트로 이 도시를 방문하여 Ratskeller식당에 식사를 하고 후에 성도 방문하였다“ 전해 주었다.우리는19시경에 Restaurant Ratskeller에서 Fontane메뉴를 즐겼다.

마지막 날 9월26일은 8시반에 출발하여 베를린 근교 Bernau에 10시경에 도착하였다. 수행자의 수고로 기차표를 자동판매기에서 발부 받아서, 지방 열차를 이용하여 Berlin Hauptbahnhof (본역)에 와서 여기서 고속열차와 지방 급행열차를 갈아타고 목적지 Bonn에 왔다.

3박 4일간 수행한 [Brandenburg 주 관광국]의 Regina Zibell 담당자에게 감사하게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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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타네 (Fontane, Theodor)의 생애 및 작품

Fontane7     ©Z. Song – Neuruppin의 약방/주거로 사용되었던 [Th. Fontane]의 생가 건물

1832년부터 1833년까지 Fontane는 고향 노이루핀 (Neuruppin)의 [Friedrich Wilhelm Gymnasium] 고등학교에 다녔다.  / www.neuruppin.de

그 후에 베를린에 있는 [Karl Friedrich Kloeden] 실업학교에 입학했다. 1834년에 그는 아버지의 이복형제인August 숙부 집으로 이사했으며, 여기서1835년에 후에 부인이 될 Emilie Rouanet-Kummer를 만나게 된다. 1836년에 실업학교 교육을 마치고 약제사의 수업을 시작해서 1840년에 학업을 마치고 1840년 가을부터 Magdeburg근처 Burg에서 약국의 조수로 일했다. 1841년, Fontane는 티프스병에 걸였으나 레친 (www.letschin.de)에 사는 양친의 도움으로 회복 되여 다시 약국 조수로 Leipzig와  Dresden에서 근무한 후에 최종적으로 그의 부친의 약국에서 일을했다.

1839년 Fontane는 최초의 단편소설 [자매애] (Geschwisterliebe)를 발표했다. 그는 문학작품 외에 기자로서 신문 특히 Kreuz신문에 집필활동을 했으며, 1842년에는 [섹스피어의 Hamlet]을 번역하기도 했다. 1844년4월1일부터 1845년3월31일까지 [Franz황제]의 호위병 제2보병연대에 지원병으로 근무, 이어 [정규병]으로 근무를 마쳤다. 이 무렵에 그는 학우 Hermann Scherz의 권유 초청으로 2주간의 영국여행을 처음 했다

1845년에 Fontane는 아버지의 약국 종업원으로 잠시 일한 후에 베를린의 Julius Eduard Schacht 박사의 약국으로 옮겼다. 12월8일에 Emilie Rouanet-Kummer(1824-1902)양과 약혼을 했다. 1847년3월에 그는 [상급약제사]로 인정을 받았다. 다음해 1848년 그는 혁명 파로서 [베를린 폭동]에 참가해서 싸우기도 했다. 1849년9월30일, Fontane는 약제사로서 직업을 완전히 그만두고 자유 문장가로 활동을 하는 것을 결의 했다.

1850년에 그는 Emilie Rouanet-Kummer 양과 결혼해서 베를린의 한 아파트에 살았는데, Fontane에게 정확한 직업이 없었었기에 처음에 결혼생활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다음해 그는 정부의 정보국 본부에 채용되었다. 1855년에 그는 정보국 특파원으로 런던에 가서 활동하였다. 그 시기에 Fontane는 [영국통신]이란 특파원 보고를 써서, [라파엘 前派 – 1848년에 설립한 화가 및 예술비평가의 모임] 라는 영국의 새로운 예술운동을 폭넓은 독자층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 되었다.

프로이쎈 왕실이 정권 교체된 것에 의해서, Fontane는 금후 프로이쎈이 자유화 될 것을 보고, 런던의 특파원 보고를 끝내고 귀국했다. 그러나 편집자로 자리가 보이지 않자 그는 紀行文學에 전념했다. 즉 19세기 중엽, 아직 당시는 특별한 사람만이 여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여행기는 아주 붐이었다. 1859년에 Wanderungen durch England und Schottland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기행) (3번의 영국 여행과 체재기) 또한 1860년에 Jenseit des Tweed (트위드 강의 저편) (스코틀랜드 紀行記) 등을 썼다. 당시 동방 세계과 유럽 그리고 다른 지역에 여행, 거기에 수반하는 모험과 위험에 관한 기사나 서적은 대중에 특히 주목이 되고 인기가 있었다. Fontane의 최초의 기행문, 예를 들면 [기념당 정원](전 프로이쎈 황태자의 정원) 등 고향 노이루핀에 관하는 기행문이 [Kreuz-Zeitung] (신 프로이쎈신문)에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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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heinsber   (c)Wikipedia Bild –  Fontane의 주유기에서 [Rheinsberg] www.rheinsberg.de

그래서 1861, 이런 기행기에 역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추가해서 [루핀 백작령]이란 작은 책을 출판되어, 1862년에 제2판에는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주유기/周遊記] (Wanderungen durch die Mark Brandenburg)라는 새로 제목을 추가했다. 그는 사망 몇 년 전까지 이 [마르크 부란덴부르크 주유기] 제1권에 손을 가해서 부분적으로 노이루핀 시대의 이웃 친구이었던 상인 Alexander Gentz의 협력을 얻어서 증보했다.

1864년에 Fontane는 코펜하겐 (Kopenhagen)을 여행하고 [독일과 덴마크의 전쟁 (Schleswig War of 1864)]에 대해서 글을 썼다. 1870년부터 Fontane는 연극에 비평을 시작했으며 동년에 그는 휴가를 취해서 [보불전쟁] (Franco-Prussian War during 1870))의 현장인 빠리를 방문한다. 프랑스에서 그는 프로이쎈 즉 독일의 스파이로 의심을 받고 체포되었으나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1815-1898)의 항의로 석방이 된다. 1873년에 [보불전쟁 / Der Krieg gegen Frankreich 1870–71](二部구성의 전쟁보고/戦争報告) 썼다.

1874년부터 76년까지 Fontane는 부인과 단 둘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및 스위스의 여러 곳을 여행했다. 이 여행을 마친 후에, 그는 다시 신문에 기사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대신에 그는 자유 소설가로서 다시 살기로 했다.

그는 기행문을 많이 썼으며 소재는 외국의 기행기(紀行記)뿐만 아니라 또한 고향 및 조국에 대한 것도 많이 취급했다. 그 예가 1862년부터 88년간에 25년 이상 거처 쓴 [마르크 브란덴부릌 주유기 / Wanderungen durch die Mark Brandenburg]로 총 5권으로 되어 있으며, 제1권은 [루핀 백작령], 제2권 오더지방 Oderland, 제3권 하벨지방 Havelland, 제4권 슈프레지방Spreeland, 제5권 [5성城 / Fuenf Schloesser (1881-1888)이다. 이 작품들 내에는 궁성들, 수도원들, 도시들 및 자연풍경, 거주인과 역사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작품은 확장된 프로이쎈Preussen의 국가관과 Romantik (문화사적인 한 시기)의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외에 희곡, 시詩, 전기 (傳記와 戰記), 편지, 일기, 연극비평, 신문기사 및 정책문서 등이 있다. 그의 주요 소설 대부분은 그가 60세(1879년) 이후가 되어서 쓰여졌다.

1878년부터 1892년 사이 거의 매년 작품들을 출간했다. 즉 다음과 같다. Vor dem Sturm (1878), Grete Minde (1880), Ellernklipp (1881), L’Adultera (1882), Schach von Wuthenow (1883), Graf Petoefy (1884), Unterm Birnbaum (1885), Cécile (1887), Irrungen Wirrungen (1888), Stine (1890), Quitt (1891), Unwiederbringlich (1892.

1892년 뇌허혈(脳虚血) 중병을 앓기 전까지 그는 수 많은 작품을 썼다. 발병 후에 의사는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유년기의 회상을 쓰도록 그에게 권면했다. Fontane는 거기에 따라서 [에피 브리스트] (Effi Briest, 1894/95)와 2편의 장편소설 Die Poggenpuhls  (1896)Der Stechlin (1898) 그리고 자서전 [20세에서 30세까지]을 완결하기까지 쓰면서 회복했다.

1898년 9월 20일에 베를린에서 사망했으며, 베를린의 [Mitte 구]의 프랑스인 공동체 제2묘지에 이장되었다. / https://de.wikipedia.org/wiki/Theodor_Font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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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TMB Tourism Marketing Brandenburg GmbH 및 Wikipedi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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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Song, Ziyul) / zsong@bluewin.ch / www.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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