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호 지사 62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감 – 보훈처의 도움으로
[고 이한호 지사] 유해 봉송식 (奉送式)이 2022년11월12일 오전10시에 스위스 대사관저 정원 뜰에서 거행되었다. 식순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그리고 순국선열 및 이한호 애국지사에 대한 묵념이 먼저 있었다. 이어서 금창록 대사의 봉송사 낭독, 송지열 전 한인회장의 추모사 낭독 그리고 A. Santschi 스위스 유도협회 전 임원 추모사 낭독이 있었다. 이어 대사관 직원, 한인연합회 임원, 스위스 유도협회, 유족 및 보훈처 대표의 헌화가 있었으며 한인 중창단 (베른 오페라극장 소속)의 추모곡으로 마쳤다.
유해는 봉송단(奉送団)(보훈처 직원 2명과 유가족 1명)에 의해 11월15일에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한 후, 오후 5시에 공항 제1터미널 서측 행사용 주차장에서 독립유공자 스위스 이한호 지사 (145본째)와 또한 프랑스 홍재하 지사의 유해 봉환식(奉還式)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11월16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7묘역에 안장(安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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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MPVA (국가보훈처) Homepage : 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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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Hwang – [이한호지사]의 대전현충원 묘소방문 (우측에서 국가보훈처의 안준범 주무관, 송지열 작성자, 유가족 외손자 황동선씨 및 외증손자 황성원씨, 2023년5월2일 방문 및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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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취리히의 제자 이한호 – 이승만박사를 초대 및 안내 함
1933년초이한호는신문을통해자기가 서울 YMCA서영어를배웠던 은사이승만박사가스위스제네바의국제기구에호소차방문하게됨을알았다. 그래서그의동서인 건축가뮐러 (H. Muller)씨와함께제네바를방문하여부활절휴가때이승만박사를취리히에초청하는제안을하였다. 또한이승만박사로는구라파체제시, 20여년전서울에서가르쳤던제자이한호와상봉하는행운을얻어그의안내로스위스의명승지를여러구석을 관람할수있었다. 이한호는세계적하키선수로서스위스여성과결혼한이한호는취리히에서유도사범으로생계를이어가고있었다. 그는자기동서인부처와함께이승만을찾아가만난후여러모로극진히대접했다
1933년 이승만박사의 스위스 방문
(c)Song Ziyul – 국제연맹 (UN의 전신)의 본부 소재지로 아름다운 제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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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Hanho Rhi, 李漢浩, 1895~1960)
– 독립운동가 및 국제스포츠 외교가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스위스 취리히에 유학 차 옮겨와서 1960년 별세하기까지 활동한 “Koreaner” (독: 한국인, 당시 조선인 혹은 고려인으로도 표현)으로 유럽 특히 스위스서 국제 스포츠인 [유도]를 보급에 선구자의 역할을 한 자랑스런 인물이다. 유럽에 오기 전에 조국과 중국에서 애국 운동을 한 분으로도 알려 지고 있다.
1895년(고종 32)에 함경남도 원산 태생이며, 경신(擏新)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이 때 한성YNCA에서 이승만박사로 영어를 배웠으며 또한 새로 도입된 호신용 [유도]를 배웠다. 후날 스위스의 취리히대학에 수학하고 동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호신의 목적으로 습득한 유도기술을 취리히대학교와 연방공과대학교의 [Academic Sports Club]에서 유도사범으로 스위스에 처음으로 가르치고 유도보급을 시작했다. 그 후 오스트리아·프랑스·네덜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지서도 유도를 지도하였다.
이 외에 1933년에 이승만박사가 국제연맹에 호소 차 스위스의 Geneva를 방문하였을 때, 은사인 이박사를 Zurich로 초청하여 정성껏 안내와 접대로 크게 도와 드린 일이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처음으로 열린 국제 스포츠 이벤트인 1948년초 스위스 쌍트 모릿츠 (St. Moritz)에서 개최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회]에 태극기를 들고 처음 입장한 선수단의 단장으로 수행한 인물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
1954년에 [서독초대총영사]로 임명되었다. 1955년 7월 스위스 유도유단자회장을 역임할 때 우리나라의 유도발전을 위하여 최초로 해외원정경기를 주선 즉 구체적 활동으로는 대한경찰상무회의 원조로 약 3개월간 스위스·오스트리아·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서독 등 순방하면서 국제시합으로한국유도를 서구에 소개하고 국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1957년 4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스위스로 돌아와 스위스의 Schaffhausen서 1960년9월18일에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참고문헌] –『대한체육회 50년』(대한체육회, 1970), 일부는 수정 보충함.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447&cid=46667&categoryId=4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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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3편으로 나누어서 더 자세히 언급 하여 보았다. 자료는 여러 면에서 수집 하여 인용하고 있으나 일부는 확인하여 수정 및 보충을 하였으나 오래된 일로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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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국내에서 배움,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
1장 한국에서 배움
2장 중국에서 독립 활동
제2편 스위스에 유도 도입 및 보급
1장 일제 강점기에 유럽에 유학생들
2장 이한호의 독일 유학 체류 (단기간)
3장 스위스와 인접 나라에 유도 보급에 공헌
4장 1933년 이승만박사 초대와 취리히와 근처 안내 (위에서 언급함)
제3편 기타 활동
1장 1948년 St. Moritz에서 개최된 [동계올림픽대회]에 한국팀 단장으로 인솔
2장 1954 – 56년 서독에 초대총영사로 임명 되여 활동함
3장 유도 유단자로 유럽 여러 나라에 국제시합으로 국위를 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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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국내에서 교육을 받고, 중국에서 독립 활동
1장 국내에서 교육을 받음
그가 태어난 시기와 곳은 이조 (이씨 조선) 말엽인 1895년에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대한 자료는 아직 언급이 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학교는 서울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경신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한성YMCA에서 이승만 박사로 영어를 배웠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경신고등학교]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이다.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목사의 창설로 정동 32번지에서 아동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언더우드 학당 (1886년5월11일)은 예수교학당 (1891년)으로 연동교회의 부속건물로 이전 (1901년1월)하였다.
1905년에 교명을 [경신/儆新]이라 명명,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15년4월24일에 경신학교 대학부 (연희전문학교의 모체)를 설립, 1929년4월18일에 교지 [儆新]도 창간했다.
일제의 박해로 교사를 경기도 양주군으로 일시 이전 (1941년3월15일), 부산 남 부민동에 피난학교 개설 (1951년9월1일)한 적이 있으며 1955년4월1일 현재의 교지(혜회동 산 4)로 이전하교 [재단법인 경신학원]인가를 받아 발전한 학교이다. 2012년9월1일 제22대 교장으로 박정음 장로가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한호는 학교 외에 이승만 박사 (미국의 유학 후에 일시 한성(漢城, 현재 서울에 일시 귀국 시 (1910 -12년), YMCA에서 이승만박사로 영어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이 무렵 조선에 1906년에 보급이 된 호신술로 유도를 배운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승만박사는 1910년 프린스턴大서 박사학위 받고 귀국, YMCA에서 교육활동 시작
이승만박사는 1910년에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일제(日帝)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에 돌아와 서울YMCA의 ‘학감’직을 맡아 청소년들에게 성경, 서양사(특히 미국사) 및 국제법 등을 가르치고 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지방의 사립학교에 YMCA를 조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자 일제 총독부는 이승만이 은밀히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105인 사건’에 연루시켜 체포·구금하려 하였다. 이 때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동아시아 총책 해리스 (Merriman C. Harris) 감독의 도움으로 체포를 면하고 서울을 탈출, 1913년 2월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자료 출처: 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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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국외/ 중국에서 활동한 일
중국/만주 북간도에서1919년 3월 16일 현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상해로 갔다. 청년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것으로 여긴다. 공훈록에 보면 다른 독립유공자들과 함께 1922년8월에 중국에서 청년 독립운동가의 조직 주비회(籌備會)에 소속 되여 활동한 것이 기록되고 있다. 이후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맹호단/猛虎団 단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독립운동 최고기관 창설을 역설했습니다.
국민대표회의 주비회(籌備會)이란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 단체로 일명 [군사통일 주비회 (軍事統一籌備會)라고 하였으며 1921년4월20일에 설립되었다. 내용은 다름과 같다. 즉 1921년 중국 북경에서 개최되었던 군사단체의 통일에 관한 협의회로 설립목적은 1920년의 청산리·봉오동 독립전투에서 전략적으로는 승리했는데도 불구하고 만주에 있던 10여 개 군사단체의 행동이 일치되지 못해 결과적으로 독립운동단체의 대부분이 시베리아로 강제이동을 당하였다.
이런 이유 등으로 여러 군사단체가 서로 협의하여 통일단체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이 회의 내용은 1920년 9월 초 이회영(李會榮)·신숙(申肅)·박용만(朴容萬)·신채호(申采浩) 등 9명이 군사통일 촉성회를 발기했다. 대표로 배달무(裵達武)를 남만주에, 남공선(南公善)을 북만주에 각각 파견하여 각 군사 당국자들과 회합을 준비하였다.
국내 국민회의 박용만, 하와이 국민군의 김천호(金天浩)·박승선(朴承善)·김세사(金世唆), 간도국민회의 김구우(金九禺), 서로군정서의 송호(宋虎), 국내광복단의 권경지(權敬止), 하와이독립단의 권승근(權承根)·김현구(金鉉九)·박건병(朴建秉), 국내청년회의 이장호(李章浩)·이광동(李光東), 대한국민회의 남공선, 국내노동당의 김갑(金甲), 국내통일당의 신숙·신성모(申性模)·황학수(黃學秀) 등 10개 단체의 대표들이 1921년 4월 20일 북경 삼패자(三牌子) 화원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군사통일방침을 토의한 결과, 러시아에 주둔하는 부대는 국내 공격 시에 출동하고, 남만주와 북만주에 산재한 부대는 유격대를 편성하여 국경 방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지휘권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줄 것인지 따로 군사기관을 신설할 것인지를 토의하다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리가 드러나 임시정부를 부인할 것을 결정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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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이한호의 유럽에서 활동
©Google Bilder – [취리히대학교] 본관의 일부 모습
1장: 일제 강점기 초반에 유럽에서 유학 및 활동한 한인들
일제 강점기 (1910년 – 1945년)의 초기에 유럽에 와서 수학이나 활동한 ‘Korean” 은 많지 않았다.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에 호소 차 1919년 4월에 온 김규식 박사를 도울 수 있는 체류자는 불과 10명 미만이었다고 한다. 이 때에 김규식 박사를 도와준 한 사람으로 영국을 거처 스위스에 와서 [취리히대학교]에서 유학한 이관용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이관용(李灌鎔, 1894-1933)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한국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도 참여했으며 구미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다른 이름 李灌溶, 李瓘鎔, 李鑵鎔, 李冠鎔, 李灌龍) 등을 사용했다. . . . . .
1914년 3월 옥스퍼드 대학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16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초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와 즉 1919년 4월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에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조직하고 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7월 17일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 조소앙과 한국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요구안’을 제출하였고, 이후 8월부터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파리위원부와 한인위원회가 통합되어 구미외교위원부가 되자 구미외교위원회 주불대표부의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10일에 사임하고, 1920년 1월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大韓赤十字社 歐洲支部長)으로 스위스의 국제적십자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정부 적십자사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였고, 동년 10월 12일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하였으며,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 후 귀국했다.
More : Lee KwanYong – 유럽최초박사 (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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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이한호의 독일에 수학 차 체류
이한호의 독일 유학에 대한 것은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 의 1925년 초에 작성한 회원 명단에 들어 있으며 전공분야는 [공학]으로 표시되어 있다. 스위스 오기 전의 기록으로 독일 칼스루헤(Karsruhe)에 체류한 것이 언급되고 있으며, 1924/25년 겨울학기에 칼스루헤 공과대학 (Technische Hochschule Karsruhe)에서 건축학에 대한 강의를 1학기 들었다. 그런데 독일에 온 것은 아마 1923과 1924년 사이로 여기는데 정확히 언제 온 것과 체류기간은 아직 확실하게 파악을 못하고 있다.
독일에 유학 한인학생들을 중심으로 1921년 1월 1일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 獨逸留學高麗學友會)를 결성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를 창립할 당시 주요 인물은 김갑수(金甲洙)·윤건중(尹建重) 등 11명 내외였다. 설립 목적은 학생 자체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의 자치와 외교에 관한 활동을 주관하기 위함이었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 1920년대 독일 거류한인들의 수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23년의 경우 한인거류인은 55명이고 유학생은 10개 대학 33명으로 총 88명이었다. 주요 인물은 간사 장을 맡고 있었던 김갑수와 서무를 맡고 있었던 윤건중 등이었으며, 1923년의 경우 이극로 (李克魯)·김준연(金俊淵) 등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기록에 의하면 서무 또는 서기에 이극로, 회계에 김필수(金弼洙)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4년 5월 현재 한인 유학생은 58명, 1925년 4월경에는 52~53명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신한 민보』에 의하면, 귀국하거나 미국으로 건너간 학생이 34명이고 남아 있는 학생은 32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1924~5년경에 많은 한인들이 독일에 유학하였지만 또한 변화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인유학생들이 1924~5년을 계기로 대거 독일을 떠나게 된 것은 학업을 마친 자들고 있지만 다른 이유는 독일의 정치·경제의 불안과 가중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귀국하거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주된 요인이었던 것 같다.
1925년 당시 독일 내 유학생은 32명으로 그 이름과 전공은 다음과 같다.
공인태 (수리학), 계정식 (음악), 김백평 (생물학), 김필수 (경제), 김현준 (경제), 김재훈 (음악), 감상수 (의학), 김종성 (공과), 김숙례 (문학), 박성채 (?), 박유진 (법학), 박주병 (의학), 배운성 (예술), 백주 (철학), 안호상 (철학), 원형택 (역사학), 윤건세 (법학), 윤동섭 (문학), 이극로 (경제), 이석중 (의학), 이의경 (생물학), 이훈(법학), 이한호 (공학), 장득우 (공학), 정상종 (경제), 정석태 (의학), 정석호 (음악), 정세희(?), 최(채?)동선 (음악), 최창헌 (공학), 황우일 (경제), 황우림 (?).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칸트슈트라세 (Kantstraße) 122번지였고, 자신들의 기관지로『회보 (Heba)』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알렸다. 이 잡지는 1925년 10월 당시 제4호가 발간된 것으로 보아, 1923년 10월 26일 개최된 ‘재독한인대회’ 이후부터인 1924년경에 출간된 것 같다. 유덕고려학우회의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으로 학업을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상호간의 구제활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 및 대외선전활동, 유럽에서 개최되는 민간차원의 국제대회 참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921년 11월경 「통고문」이라는 선전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 지지와 존속을 위한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는 구제활동·임정지원활동·대외선전활동·국제대회 참가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유덕고려학우회]는 포츠담에서 매년 8월 29일을 [국치일]로 삼아 기념식을 갖고 나라 잃은 아픔과 독립의 의지를 되새겼고, 매주 강연 또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관용을 강사로 초청해 강연회를 가졌다. 유덕고려학우회는 1922년 당시 [백림 조선인 구락부] 회관을 마련할 계획을 수립했는데 유학생 대부분이 고학생이라는 어려운 여건 때문인지 구상으로만 그친 것으로 보인다.
자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26991&cid=46623&categoryId=4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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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스위스서 활동 – 유도보급에 공헌 – 스위스에 유도 선구자
호판 이한호 (1895년 생 – 1960년9월18일 샤프하우센 사망)
이한호는 스위스에 유도의 선구자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조카이다. 이한호는 1925년에 [취리히 대학교]에 등록해서 1936년에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에 이한호는 [취리히대학교]와 [스위스연방공과대학/ETH]의 [Academic Sports Club]에서 처음 유도를 가르쳤고, 따라서 이 무술을 스위스에 가져왔다. 1929년에 스위스 취리히 (Zuerich) 에서 첫 유도학교/도장 [Judo Sport Klub Zuerich]을 세웠다.
그 후 1937년에는 [스위스 유도협회]의 창설에 관여했으며 회장이 되었다. 이 회장직은 1940년까지 활동했다. 1948년6월에는 [오스트리아 아마추어 유도협회]의 첫 여름학교를 [스위스 연방 스포츠학교]에서 이끌었다. 이한호는 유도에서 7단(Dan)의 대가 급에 도달했다. 즉 1953년 대한 유도회로부터 7단을 받았다.
이한호는 스위스 아펜쩰 (Appenzell) 에서 향수자료 생산자로 활동하고 있을 때, 1954년에 서독 (독일 연방공화국)의 수도 본 (Bonn) 주재 대한민국의 총영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총영사관을 위해서 그의 사택을 레마겐 (Remagen) 에 소재하는 건물 [Haus auf Leims] 를 총영사관으로 본국정부의 알리지 않고 임대했다. 서독정부로 부터는 [대한민국의 무역대표부]로 인정을 받고 외교관의 신분을 얻었다. 한국 정부는 의심스러운 금융 거래로 인해 그의 직책을 정지 받은 후에 1956년7월에 그는 스위스로 돌아왔다. 그는 스위스 샤프하우센 (Schaffhausen)서 태어난 뫼클리(Margrit Moekli) 스위스 여성과 결혼했다.,
(c)Swiss Judo Ass. – 1937년 [스위스 유도협회] 창립시 사진 (이한호 박사, 앞 왼편에서 3번째
- 취리히/스위스에 유도 도입/보급
“Koreaner’ (한국인) 이한호는 1925년에 스위스로 옮겨서 취리히 소재 대학교에서 수학을 하게 된다. 한국의 자료에는 취리히 대학교를 다녀서 경제학박사를 취득 했다.”로 되어 있다.
취리히 시는 스위스 최대 (현재 인구 약 38만 명)에는 대학교가 2개 있다. 하나는1833년에 설립된 [주립 대학교]로 [Universitaet Zuerich, www.uzh.ch]와 다른 하나는 연방정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1855년에 설립된 [국립공과대학교] ETH Zuerich, www.eth.ch ]가 있어서 당시에 정확한 구별이 어려웠다.
1927년에 취리히에 소재하는 양兩대학교와 다른 전문대학의 대학생들을 위한 스포츠 기관으로 [ ASVZ = Akademisch Sports Verein Zürich)가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한호는 여기서 유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 www.asvz.ch
1929년에 취리히에 이한호는 12명의 학생으로 스위스 최초의 유도 도장을 설립하었다. 이어서 스위스의 여러 곳에 유도 도장/학교가 설립함을 언급하고 있다. (자료: 스위스 유도 역사 / www.fudschisan.ch/judo/geschichte.html
[취리히](Zurich)는 스위스 최대의 도시로 교육, 문화, 교통 경제 및 금융 등의 중심지이다. / www.zuerich.com
이한호는 일본에게 외교권이 빼았긴 강점기였으나 “Koreaner (독어: 고려인, 조선인, 한국인)”로서 유도를 스위스에 보급 그리고 [스위스유도협회]를 창립 및 회장으로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스위스 유도협회]를 1937년에 창설하고 1940년까지 초대 및 2대의 회장으로 봉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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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스위스의 활동한 자료는 주로 독문으로 된 [스위스유도협회 75주년] 기념책자와 각 유도 도장의 역사 서술한 독문 그리고 독일에서 발간하는 유력 주간잡지 [Spiegel] 에서 얻은 자료 들이다.
- 바셀 (Basel)
바셀의 유도 클럽은 1935년5월9일에 스위스에서 부도(武道)의 가장 오랜 클럽의 하나로 창립 되었다. 창립 기록에 창립자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935년7월28일에 [바셀무술클럽]이란 것만 언급되고 있다. 1945년에 [바셀유도클럽] (Basel Judo Club)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유는 스위스 연맹에 속하는 모든 클럽은 [유도클럽/협회]로 명명하였다. 오늘날 이 바셀클럽은 스위스의 최대 유도클럽에 속한다.
(Der Verein wurde als einer der ältesten Budo-Vereine in der Schweiz am 9. Mai 1935 gegründet. Im Grüdundungsprotokoll wird kein Name vermerkt. Dieser wurde erst am 28. Juli 1935 mit Jiu-Jitsu-Club Basel angegeben. 1945 erfolgt die Namensänderung auf Judo Club Basel. Grund: Alle dem Schweizerischen Verband angeschlossenen Vereine nennen sich Judo-Club. Heute gehört der Verein zu den grössten Judo-Clubs in der Schweiz.)
https://de.wikipedia.org/wiki/Judo_Club_Basel / www.judobasel.com
바셀 (Basel) – 스위스 북서부에 위치하는 국경도시이다. / www.bas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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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쌍트 갈렌 (St. Gallen)의 도장 설립에 협조
[쌍트 갈렌 유도 클럽]은 벌써 1936년에 태어났다. 그래서 이 [쌍트 갈렌 유도협회]는 [스위스 유도협회]에 [취리히 유도협회, JJJC Zurich]와 [바셀 유도협회, JC Basel]와 함께 창립 멤버에 속한다. 이 클럽은 80년의 역사를 가지며 그간 어려웠지만 성공적으로 발전이 되었다. 어려움 특히 1939년9월에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하자 도장은 [레온하르트학교교사](Leonhard-Schulhaus)의 지하실에서 불안정한 조건에서 훈련한 것이다. 그러나 Leo Senn박사와 불굴의 이한호 박사의 덕분으로 유도는 전후에도 계속 발전 하였다.
막스 훙거뷜러 (Max Hungerbuehler)씨의 덕분으로 1951년에 도장이St. Georgen-Strasse에 생기고 1968년에는 Muehleggtreppe로 옮기게 된다. 도장을 옮긴 첫 결실이 나타났다. 이미 3년 후에 [쌍트 갈렌 유도클럽]은 스위스의 가장 강한/무서운 유도클럽이 되었다. 그 당시 심지어 프랑스어권의 도장들도 이 강한 동부 스위스의 클럽에 한번도 도전하지 못했다. 이 클럽은 도교 히라노 (Hirano) 의 2번 세계챔피어인 이한호박사, 대가 미후로 콘도 (Mihuro Kondo) 및 스위스 최고의 기술자 Tehodor Misslin등의 톱 지도자들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Klub-Geschichte von St. Gallen / www.jcsg.ch/unserclub-m/club-geschichte
쌍트 갈렌 (St. Gallen): 동부 스위스의 가장 큰 중심도시 / www.st.gallen-bodensee.ch
1937년에 취리히, 바젤 및 쌍트갈렌의 유도클럽을 합하여 [스위스유도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여 1940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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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프하우센 (Schaffhausen)의 유도 보급
20세기 초에 벌써 일본 유도 교사들이 유럽과 스위스에 왔다. 1929년에 한국유학생 이한호가 스위스 취리히에 첫 클럽을 설립했다. 이한호는 이후에 샤프하우센의 여성과 결혼을 하였기에 이 도시에 유도 도장 설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러나 처음에 하나로 설립하였으나, 나중에 유감스럽게도 이해관계가 다른 2개의 협회로 나누어졌다. 이 2개의 협회는 오래 동안 각자의 방법으로 유지되었다. 1971년에야 2 다른 것 (하나는 벌써 존재하지 않았으나) 클럽이 하나 [샤프하우센유도클럽 / Judo Club Schaffhausen]로 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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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wiss Judo Asso. – 193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개최된 [국제유도하기학교]의 참가자들 (두째 줄 왼편 이한호박사)
이웃 나라에 유도를 보급하는데 공헌을 한 사례
이한호박사는 취리히에서 유도클럽을 조직하고 그 클럽을 이끌었으며 이 외에 스위스의 다른 도시와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까지 유도의 보급•지도에 진력했다.
1933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유도국제하기학교]를 스위스의 이한호박사의 주도하에 여러 일본 고단자 교사들과 함께 실시 거행하였다.
1936년에 처음으로 외국의 팀 즉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수 팀과 국제친선 경기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 Die Gründung des OeAJV (오스트리아 유도협회)의 창립
[오스트리아 유도협회]는 1948년에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인츠 코봘스키 (Heiz Kowalski)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협회는 1947/48년에 20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새로 태어난 협회는 첫 공식활동으로 [유럽유도협회 = EJU]에 참가하는 것을 결정했다. [유럽유도협회]의 비공식 설립은 1948년7월26일에 런던에서 설립했다. 이 창립의회에 프란츠 님퓌어 (Franz Nimfuehr)와 프로스퍼 부헬레 (Prosper Buchelle)씨를 파견했다. [유럽유도협회]의 공식적 설립은 1949년10월29일에 네덜란드에서 개최되었다. 이 협회는 1952년에 [국제유도연맹 = IJF]로 변환하였으며 동시에 오늘날의 개존하는 [유럽유도협회]로 형성되었다.
이 외에 스위스와 독일의 표본에 따라 협회하기학교 실시를 결정했다.
이런 첫 번째 코스는 1948년6월20일부터 26일까지 쉬일라이텐 (Schielleiten) 연방 스포츠학교에서 스위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이한호박사의 지도하에 개최되었다. 1년 후의 여름 수련코스는 [연방체육 연구소 = BAfL]와 협력으로 실시되었으며 3주간 계속되었다. 계속해서 현재까지 있는 이 코스에 강연자로 위대한 거장 이박사가 하였다. 이박사 외에 특히 Noritomo Otani, Fukuda, Tokio Hirano, Kazuzo Kudo, Skokichi Natsui, Mahito Ogho, Anton Geesink 등의 여러 거장들이 었다.
1950년, 창업에서 2년 후, [오스트리아유도협회]는 9 클럽 (이 중에 7은 비엔나에서, 2 클럽은 잘츠부르크에서) 과 등록된 합계 800명의 유도를 배우는 사람들을 가진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금년은 협회의 회장이 칼 나글 (Karl Nagl)씨가 하인츠 코봘스키에서 바뀌었다.
자료 출처: Die Gründung des ÖAJV, (Österreichischer Judoverband 1948)
오스트리아 (Austria) – 스위스 동쪽의 이웃 나라로 관광에 매력이 다양한 나라 / www.austri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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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yerische Judo Verband (독일 바이에른 유도협회)
로베르트 로트 (Robert Roth)는 바이에른의 유도 처음 세대에 속할 뿐만 아니라 선구자로 표시하나 그의 50년간 뮌헨과 주위지역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로버르트 로트는 1957/58년에 정육점 (푸줏간)에 대한 고급 교육을 받기 위해서 스위스로 간다.
여기서 그는 그가 좋아하는 유도 스푸츠에 전심했다. 다행한 것은, 여기 쌍트 갈렌에서 그는 한국인 약사 이한호박사를 알게 된 것이다. 이한호박사는 Kowaishi (프랑스), Koizumi (영국)와 함께 오늘날 유럽 유도개척자 중에 하나이다.
자료 출처: www.b-j-v.de/home/personen/show/die-legende-lebt
바이에른 (Bayern) 현재 남부 독일의 한 주 (한 때는 나라) / www.bayern.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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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ongZiyul – 스위스 최대의 도시 취리히(Zurich)의 아름다운 호수 풍경
[스위스]와 한국 유도 / 고 이한호 박사 전수
한국의 독립투사 고 이한호 박사가 최초로 한국 유도를 「스위스]에 심은 이래 현재 「스위스」에는 80여개의 유도「클럽」과 4천5백여명의 회원이 있다. 일본식이 아닌 순수한 한국식 유도로 커 가는 스위스는 이제 「유럽」제일의 유도 강국이 되었다.
지난 3월12일 상오8시부터는 「상·갈렌」의「에케하르트·호텔」연회실에서 고 이한호 박사의 추모를 겸한 「상·갈렌」유도30년 기념축제가 열렸다. 「스위스」유도「클럽」 주최로 거행된 이 축제는 약5백명의 회원이 모인 가운데 아리랑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풍거뷜러씨 노력으로 구주서 최강 – |80여개「클럽」에 회원만도 4,500명
주한 불대사 전규흥씨의 사위이며 58년 한국유도협회에서 4단으로 인정받은 바 있는 막스 ·풍거뷜러」회장은 이 자리에서 고 이 박사의 유덕을 치하했으며 유도의 원칙을 간단히 소개하고, 이어 유도·검도·태권 등의 시범「게임」이 있었다.
1955년 여름 석진경 방영두 박정준씨 등 한국 유도의 권위자들이 이곳을 찾아 한국 유도의 처녀 시범과 함께 하기 강습회를 열어 막대한 성과를 올렸으며 이래 「스위스」에 남겨진 한국의 인상은 어떤 외교적 노력으로써도 얻어질 수 없는 귀중한 것이었다.
고 이 박사의 유일한 후계자이며 한국의 넋을 「스위스」에 심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는 「풍거뷜러」씨는 부인 전영숙 여사와 4살짜리 딸 「코지마」, 두 살짜리 아들 「마르크」군과 함께 조촐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동양, 특히 한국의 고전 미술과 음악에 취미와 조예가 깊은 동씨는 60년8월에는「상·갈렌」박물관에서 한국 조각 미술전시회를 연적도 있다. 작년에도 무역 관계로 한국을 다녀온 바 있는 동씨는 금년 5월엔 가족 모두가 서울에 있는 장인 댁에 가서 반년쯤 지내고 올 계획이라고 한다. 【조혜자 통신원】
[출처: 중앙일보] 『스위스』와 한국 유도|고 이한호 박사가 처음 전수
위의 기사 중에 [풍거뷜러]씨는 [훙거뷜러] (Max Hungerbuehler)씨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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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柔道)의 역사
우리나라 고유의 무술(武術)로 알려진 『수박(手搏)』으로 시작된 유도의 기원은 정확한 시기와 창시자가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다만 故 이제황(李濟晃)선생의 저서 [新柔道]에 『우리나라의 유도가 매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구려(高句麗) 산상왕(山上王) (A.D. 197∼ 226)때의 왕도(王都)였던 환도성(丸都城) 각저봉 현실(玄室)의 벽화(壁畵)가 말하여 준다』고 되어 있다.
또 『그러나 오늘의 유도(柔道)가 유술(柔術)로서 발달(發達)한 것은 고려(高麗) 중엽(中葉)부터 이다. 즉, 고려 제15대 숙종(肅宗)왕(1097∼1106)代에 이르러는 일종(一種)의 정재(呈才)로서 음악(音樂)과 더불어 장려(奬勵)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이때는 유술(柔術)을 수박(手搏) 또는 각저라 불렀다. 왕은 이를 애호(愛好)하여 상춘정(賞春亭)이나 마암(馬岩) 등지에 거동할 때는 수박희(手搏戱)를 연시(演示)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인종(仁宗)왕(1123∼1146)때에는 무인(武人)의 세력(勢力)이 커지면서 이를 군인(軍人)들의 상예 (常藝)로 장려하였다. 또한, 고려(高麗)에서는 매년(每年) 5월이 되면 연중행사 (年中行事)로서 대시합(大試合)을 열었다 하였고, 그 당시 유술(柔術)에는 25法이 있었으며 그밖에 10種의 비법(秘法)이 있었다 한다. 급소(急所)지르기 등 25法은 신법(身法), 수법(手法), 각법(脚法)을 주축(主軸)으로 하여 비등(飛騰), 전기(顚起), 도삽, 횡권(橫券), 활착(活捉), 조천(朝天) 등으로 변화를 이룬다고 되어 있다. 그 후 비법(秘法)은 비전 (秘傳)으로 구전심수(口傳心授)되어 내려오다가 이 비법(秘法)들은 임진왜란 (壬辰倭亂)때 일본(日本)으로 이식(移植)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1882년에 강도관 유도의 창설자(創設者)인 가노지고로(嘉納 治五郞)는 그때까지 전해 내려온 유술(柔術)의 각 유파(流波)중에서 좋은 것은 택하고 위험(危險)한 것은 제외했다. 그는 여기에다 새로운 기술(技術)을 첨가(添加)함으로써 정신수양과 체육의 목적인 오늘의 유도(柔道)를 완성했다.
가노 지고로(1860∼1938)가 집대성했다. 즉, 과학적 기초 위에 새로운 체련법, 수심법, 승부 법을 정하여 유도라 칭한 후 1882년 강도 관을 세워 교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까지의 유도는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덤벼들어 치고 받고, 잡고 넘어뜨리고, 누르고, 조르고, 꺾고 하던 종합 무술이 전부였다. 그러나 서구의 스포츠에 영향을 크게 받아 일부는 태권도와 씨름으로 분리 되어 계속 발전되었고 일부는 오늘날 유도로 발전되어 왔다. 그러다가 1952년 국제 유도연맹이 조직되고 1952년 동경에서 세계선수권대회가 개최됨으로써 유도의 국제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유일하게 동양에서 발달되어, 1964년 제 18회 동경 올림픽대화부터 정식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된 유도는 힘, 기술, 그리고 정신력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강한 매력을 지닌 경기로서 현대 사회에서 역동적인 스포츠로 확립되었다.
현대 I. J. F.(국제유도연맹)의 회원국은 5개 대륙연맹에 속한 175개 국가이며, 한국은 1956년 가입한 이후 1990년대부터 국제유도를 이끌어 오고 있다. . . . . .
- 유도의 의의(意義 )
유(柔)의 의미는 초목의 새싹을 말하고, 중심이 되는 심은 강직하고 씩씩하므로 사물을 움직이며 신체는 유연하고, 심은 욕심껏 공방 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무리하지 않고 도리에 순응하며 승리를 하는 것, 다시 말해 순리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뜻한다.
그 원리를 설명하면, 10의 힘으로 밀어 오는 상대에게는 그 힘에 맞서지 않고 자기가 물러서서 그 10의 힘을 전력 발휘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 몸은 안정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자신의 힘이 5일지라도 상대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3의 힘을 이용해서도 승리할 수가 있으며, 2의 힘이 남게 된다. 이 남아 있는 힘을 타에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
즉 상대의 힘을 내 힘으로 활용하여 역학적인 원리로 사용하면, 작은 힘으로도 능히 큰 힘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작은 힘을 이용하여 큰 힘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유도(柔道) 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이다.
도(道)는 동양 도덕의 중심을 뚫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원칙으로 인간이 필히 따라야 할 원칙이다. 따라서 인간 생활 전반을 통한 대도라는 의미로 풀이되어 심신일체에의 행을 통하여 그 대도를 얻는 것이다. (도道는 길 또는 정신수양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다운 길, 정도의 길, 수련의 방법을 의미한다).
유도는 심신의 힘을 가장 유효하게 사용하는 도이다. 그 수행은 공격과 방어의 연습에 의해서 신체 정신을 단련, 수양하고 그 도의 진수를 체득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자기를 완성하고 세상에 보익하는 것이 유도 수련의 주된 목적이다.
다시 말하면 «정력선용», «자타공영»이 그 의의이다. 정력선용이란 강한 훈련을 통하여 얻은 건강한 체력, 건전한 정신력을 의롭고 선한 방법으로 이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타공영이란 유도의 깊은 뜻을 정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통하는 것이어서, 기반에 행이라는 실천적 수련이 깊이 내장되어 있다. 유도 수련에 의해서 달성된다고 생각되는 이상의 경지를 지적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상대도 공히 번영한다는 것으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상호협력의 정신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자기의 전력을 선한 것을 위하여 유효하게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완성하고, 인류와 사회에 이익이 되게 함으로써 자기도 타인도 공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유도 기술에 일관하는 원리인 동시에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원리로서 유의 도이다. 이렇듯 유의 본성을 갖고 있는 심신을 최대한 유효하게 하는 유도는 인간으로서의 희망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한다.
- 근대화된 한국유도
근대화(近代化)된 유도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에 관하여 여러 설들이 주장되고 있다. 고故 이제황 (李濟晃)선생의 저서 [신유도(新柔道)]에 의하면 체계화된 유도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Y.M.C.A)에서 1909년에 유도를 시행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1928년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유도부에서 유도 용어를 우리말로 제정하여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29년 9월에는 전조선(前朝鮮) 중학교 유도대회가 동경(東京)유학생(留學生) 무도회 (武道會) 주최로 열렸다. 같은 해 10월에는 황성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전조선단체유도대회 (前朝鮮團體柔道大會)가 개최되었으며 1930년 6월에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전문학교에서 전 조선중등학교 (朝鮮中等學校) 대항(對抗)유도 대회가 개최되었다.
다음해인 1931년에는 조선연무관(朝鮮硏武館)이 이경석선생에 의해 개설되었으며 1932년에는 조선유도연맹회(朝鮮柔道聯盟會)가 조직(組織)되었다. 그 이후에도 1934년에는 조선유도유단자회 (朝鮮柔道有段者會)가 결성되어 활성화되어 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 말기(末期)인 1938년에 이르러 일제 하에 모든 도장(道場)을 강도관(講道館) 조선지부(朝鮮支部)로 강제(强制) 통합(統合)되는 시련(試鍊)을 겪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나고 해방(解放)이 되자 그 해 10월에 재경유도유단자 (在京柔道有段者) 일백 여명이 조선유도연맹(朝鮮柔道聯盟)을 결성하여 한국(韓國)유도를 재 부활(復活) 시켰으며 유도(柔道) 용어(用語)를 새로이 제정(制定)하였다.
또한, 1952년에는 국제유도연맹이 결성되면서 세계화가 되었으며, 한국유도를 이끌 중견지도자 양성(養成)을 목적(目的)으로 대한유도학교가 故 이제황 선생에 의해 1953년도에 설립(設立)되었다.
1956년에는 재단법인(財團法人) 한국 유도 원이 발족(發足)되었고 그 해에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유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採擇)되었다.
1984년 미국(美國) LA올림픽에서 안병근 선수의 첫 금메달 획득(獲得)을 시작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유도가 드디어 종합1위의 성적을 거두는 업적을 세웠다. 날로 유도가 세계(世界)대회 및 국제(國際)대회에서 국위(國威)선양(宣揚)을 하고 한국유도의 위상(位相)을 드높이고 있다. 한편, 여자 유도는 1988년 서울올림픽 시범종목에 이어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5년 9월 일본 지바 마쿠하리에서 개최된 국제유도연맹 (I.J.F) 총회(總會)에서 우리나라가 제7대 회장 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올림픽 정식종목 사상 최초로 한국인이 전 세계 175개국의 회원국이 가맹된 국제연맹회장(朴容晟, 1940)국이 된 것이며, 대한민국 유도계 뿐만 아니라 한국 체육사에 영원히 기록될 사항이다.
자료 출처? – 국제유도연맹 (International Judo Federation)
제3편 기타 그의 활동이한호박사는 국제스포츠와 외교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1948년2월에 스위스 쌍트 모릿츠 (St. Moritz)에서 개최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회에 우리나라 선수단의 단장으로 참가한 일이다. 다음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서독총영사로 임명되어 활동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 경무청의 위임을 받아 한국 유도팀을 유럽에 친선차 방문 하는데 단장으로 인솔을 하게 되는 것이다. (c) Wikipedia – [동계올림픽대회]가 2번 열린 쌍트 모릿츠 도시과 1948년대회의 한 장면
1장 [St. Moritz 동계올림픽대회]에 선수단의 단장 1948년1월30일부터 2월8일까지 스위스 쌍트 모릿츠 (St. Moritz)에서 개최된 [제5회 동계올림픽 대회]에 처음 태극기를 들고 이 국제스포츠 대회에 한국 선수단이 참가하였는데 이때의 단장으로 인솔한 사람이 스위스에 거주한 이한호 박사이었다. 빙상/스케이팅 선수 3명과 훈련 감독 1명 및 통역겸 총무로1명 도합 6명의 미니 클럽이었다. 그러나 태극기를 들고 입장한 최초의 국제스포츠 행사인 것으로 한국에 큰 의의가 있었다. 아래의 개막식에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는 한국선수단을 보여주고 있다. 1948 Winter Olympic Game / www.stmoritz.ch/en/st-moritz/olympic-host-city St. Moritz (영: 생모리츠) – 동계올림픽 2회 개최지 / www.stmoritz.ch/ 70년 후인 2018년2월에 제23회 [동계올림픽대회]가 대한민국 강원도의 평창에서 개최 될 예정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다. 올림픽 최초로 휘날린 태극기’ 1948년 제5회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 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입장하는 사진이 발견됐다. 김광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은 2일 성모리츠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사진을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보무 당당히 오륜회장에 유사 이래 처음 참가하는 역사적 순간’이라는 글귀와 이 대회에 참가한 이한호 (당시 스위스 취리히대 교수) 단장, 통역 겸 총무인 월터 정, 최용진 감독과 이종국 이효창 문동성 선수의 이름이 적혀 있다.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은 1948년 1월 30일부터 10일간 열려 그 동안 한국이 광복 후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로 알려진 1948년 7월 영국 런던 하계올림픽보다 앞선 것이다. 한국은 ‘COREE/KOREA’라는 이름을 내건 첫 국제대회인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서 노 메달에 그쳤지만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전 세계에 알렸다. 자료 출처: 동아일보에서 / http://news.donga.com/3/all/20070703/8461658/1 하늘엔 태극기… 가슴엔 ‘KOREA’ (동아일보에서) 어떻게 하여 참가할 수 있었는가? 한국이 올림픽 첫 출전한 것으로 1948년 1월 30일 ~ 2월 8일까지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제 5회 동계 올림픽이다. 정부 수립보다 7개월 앞선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의 영문표기 코리아 KOREA/COREE를 앞세워 올림픽을 무대로 국제사회를 향해 ‘출신 신고’를 한 셈이다. 한국은 선수 4명 임원 2명을 파견하여 28개국 669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시 광북 한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2차 세계대전 승전국 미국의 군정 치하에 있었다. 정부 수립도 1948년8월15일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1947년6월2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47차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총회에서 50번째 회원국으로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이듬해 쌍트 로릿츠 동계올림픽 출전이 가능했다. 한국의 IOC 가입은 아시아에서 인도, 일본, 필립핀, 중국 (타이완), 스리랑카에 이어 여섯 번째 이다. 한국이 IOC 회원국에 합류하게 된 과정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한국은 정부 수립 이전이라 IOC 가입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조선체육회 (당시는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정해지지 않아 조선으로 통용됐다.) 부회장 이상백, 민정장관 안재홍, 조선올림픽 위원회 총무 정상윤 등이 발 벗고 나서 재미동포 전경무를 올림픽 대책위 부위원장으로 영입하면서 물꼬를 텄다. 전경무는 1906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민 길에 오른 부모룰 따라 태평양을 건넌 뒤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인물이다. 그는 미국 중북부 지방 명문 미시간대학 정치학과 재학 중 유색인 최초로 전미(全美) 대학웅변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대중 연설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다. 활달한 성격에 사업 수완도 능했던 전 경부는 미국 백인 주류사회 ‘와스프 (WASP = White-Anglo-Saxon-Protestant/앵글로색슨계, 미국 신교도)를 말하며 흔히 미국 주류 지배계급을 뜻함)’ 인정하는 사교계의 멤버로 자리를 잡았다. 이를 바탕으로 탄탄한 인맥을 구축한 전경무는 전승국 미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되던 IOC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전경무는 실제 IOC 부위원장이자 미국올림픽위원회 USOC 위원장이던 에이버리 부런디지 (A. Brundage)와도 친분을 쌓았다. IOC와 미국 내 스포츠 최고 실력자와의 돈독한 교분은 그를 신생독립국가이자 자신의 조국인 한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브런디지가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국사령관으로부터 USOC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전경무는 자연스레 미 군정 최고사령관 존 하지중장과도 ‘핫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해방 정국에서 하지 사령관은 사실상 남한의 최고 통치자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IOC 가입에 전경무가 전격 발탁된 것은 한국의 축복이자 행운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미 군정이 발급한 ‘제1호 KOREA 여권’의 주인인 바로 전경무다. 전경무는 조선체육회 부회장 겸 올림픽대책위원회 부회장 자격으로 부런디지를 필두로 자신의 국제 스포츠 인맥을 총동원해 한국의 IOC 가입을 성사시켰다. 한국외교사는 전경무의 이 같은 업적을 기려 ‘스포츠 외교의 첫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호사다마 (好事多魔 = 좋은 일에는 갖은 방해가 뒤따른다는 뜻)였을까 전경무는 IOC행에 필요한 모든 사전절차를 끝내고 가입신청서만을 품에 안은 채 스톡홀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비운의 추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그를 태운 미 군용 C-54 수송기가 김포 비행장을 떠나 일본 후지산 근처를 비행하던 중 추락해 탐승객 41명 전원이 숨지는 대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1947년5월29일 밤의 일이었다. 벼락을 맞은듯한 충격에 빠진 이상백을 비롯한 조선체육회 누뇌부는 부랴부랴 미국에 있던 독립운동가 이원순을 스톡홀름에 대리고 파견해 가입신청서를 제출했고 이는 그대로 IOC총회를 통과했다. 이런 사연을 가슴에 묻고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에 태극마크를 처음으로 달고 출전한 국가대표는 남자 스피드스케이팅의 최용진 (500m, 1500m), 이종국 (1500m, 5000m), 이효창 (500m, 1500m, 5000m, 괄호 안은 출전종목) 단 3명이었다. 이 중 이효창은 1944년 全 일본선수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유망주였다. 그는 올림픽 개막 직전 현지에서 열린 친선경기 5000m와 1만m에서 1위에 오르며 금메달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최고 성적은 이효창이 기록한 19위였다 (1500m). 500m가 주종목인 문동성도 참가했으나 당일 컨디션 난조로 출전을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김광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이 수년 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사진을 공개해 관심을 끌었다. 이 사진에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보무당당히 오륜장에 유사 이래 처음 참가하는 역사적 순간’이라는 글귀와 이 대회에 참가한 이한호 (당시 스위스 취리히대 교수) 단장, 통역 겸 총무인 월터 정 (재미 동포로 본명은 정범택), 최용진 감독과 이종국, 이효창, 문동성 선수의 이름이 적혀있다. 김부회장은 “1980년대 초 일본에서 생모리츠 올림픽 감독이었던 최용진씨에게서 이 사진을 받았다. 새모리츠 올림픽 때는 카메라가 거의 보급되지 않아 한국체육사에 귀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료: 한국을 빛낸 스포츠 영웅들 / http://pre.bookcube.com/epub.php?book_num=131202309 스포츠가 대한민국이다. 연관된 인물 언급 전경무 ((田耕武) ) – 애국장 수여 (95) / 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6920&ipp 이원순 (李元淳) – 애국장 (91) – 독립운동가 / http://knamf.org/%EC%9D%B4%EC%9B%90%EC%88%9C 월터 정 (Walter Chung, 본명: 정범택/鄭凡澤 또는 성복/成福) –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자료 출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09 에이버리 브런디지 (Avery Brundage, 1887 – 1975) – 미국의 운동선수, IOC 위원장 https://en.wikipedia.org/wiki/Avery_Brundage 존 하지 (John Reed Hodge, 1893 – 1963) – 군정최고사령관, 대장으로 퇴역 https://en.wikipedia.org/wiki/John_R._Hodge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1880 – 1964) – 미국군인으로 원수, 연합군사령관 https://en.wikipedia.org/wiki/Douglas_MacArthur = = = 2장 서독 초대 총영사로 인명 1954년5월21일자로 서독 초대 총영사로 이한호박사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독 정부측에서는 아직 한국에 총영사가 설치되지 않아서 무역대표부로 인정하고 사무소의 책임자에게 외교관 신분을 인정하여 주었다. 총영사관 건물 마련과 업무로 2년간 활동하였으며, 외무부에서 박대영 부영사를 후임자로 임명하자 그의 업무를 마치고 스위스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안전을 위해 10년간 총영사관을 빌린 것이, 총영사관이 쾰른으로 옮기는 사정상의 이유로 임대관계가 잘 정리되지 않아서 언론에 좋지 않는 면으로 게재되여 유감스런 일이 생겼다. (아래의 독문 참조) . 서독은 1954년 2월 12일 ‘한국에서의 독일 적십자병원에 의한 원조에 관한 협정’을 미국과 체결하고 야전병원을 부산에 설립, 의료봉사로 적극 원조하였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긴급구호계획에 따라 47,619달러를 기부했다. 한국 전쟁의 휴전 후 한국은 총영사관 교환을 희망한데 대해 독일연방공화국은 상업 대표단의 교환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이견 속에, 1954년 10월 1일 한국은 독일 레마겐에 총영사관을 개설하고, 초대 총영사 직은 이한호가 맡았다 (1954년 5월 20일~1956년 8월 2일). 독일 정부는 한국에 세운 총영사관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한국무역대표단 (Koreanische Handelsvertretung)으로 승인(1955년 1월 22일)했다. 1954년에5월21일에 [초대 서독총영사]에 임명되다. “初代西獨總領事 李漢浩氏를 任命”. (경향신문. 1954년 5월 25일. 1면) 韓國과 獨逸聯邦共和國(西獨)이 外交關係를 맺는 最初의 措處로서 總領事를 交換하기로 兩國間에 合意를 보았다는 바 獨逸 「본」市에 駐在할 初代總領事로서 李漢浩 博士가 去二十一日字로 任命되었다하며 同氏에 對한 信任狀도 이미 發送되었다고 한다. 자료: 한독관계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8F%85_%EA%B4%80%EA%B3%84 제3장 해방 후 처음 유럽에 한국유도 선양 우리나라의 유도발전을 위하여 최초로 해외 원정경기를 주선하였다. 구체적 활동으로는1955년7월에 [스위스유도유단자] 회장을 역임할 때 [대한경찰상무회]의 원조로 약 3개월간 서유럽 6개국 즉 스위스·오스트리아,·벨기에,·네덜란드,·프랑스,·서독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하면서 국제시합 및 순회지도로 한국유도를 서구에 소개하고 국위를 크게 선양하였다. 한국 유도가 처음으로 유럽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48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 나라는 독립 후 처음으로 스위스 생모리츠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는데, 이때 우리 선수단은 스위스에서 활동 중인 이한호 박사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국내에서도 해방 후 통합 유도 연맹이 발족하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한호 박사에게 전해졌고, 이것이 이한호 박사가 국내 유도계와 접촉한 계기가 되었다. 자료출처: 선진경의 [나의 인생 나의 유도]의 3장 <유도 사절단, 유럽 순회 지도 대장정에 나서다> 중에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BOK00018926729IN / 석진경 «1957년 40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가 다시 서독에 건너가 본에서 별세하였다.»로 언급되고 있는데 [스위스연방정부 Archiv에 보관된 자료에 의하면 1960년9월18일 스위스 Schaffhausen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 = = 유럽에서 활동한 다른 유명 Koreaner 로 [이관용 박사]를 소개한다. : Lee KwanYong – 한인유럽최초박사 (eurasiatour.info) = = = 본인은 독일 제 대학교에서 수학하다 1968년11월7일부터 스위스 최대 도시 취리히 (독: Zuerich, 영: Zurich)로 와서 [취리히 주립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1973년12월) 직장을 갖고 활동하였으며 2000년5월말로 정년이 되었다. 이 후에 반 소일로 온라인 관광 정보용 매거진 [EurAsiaTour Info / www.eurasiatour.info]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기간에 이한호박사에 대한 공적을 알면서, 조금 더 알리고 싶어서 이곳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위의 기사를 마련했다 (처음 게재일: 2014년1월1일) = = = 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zsong@bluewin.ch / www.eurasiatour.inf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