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승만 박사 1933년의 유럽 여행의 의의(意義) 과 성과
歐美委員部 이전하고 제네바(Geneva)로
워싱톤(Washington)으로 돌아온 李承晩은 1931년3월7일에 歐美委員部 사무실을 Northwest H가 1343번지의 빌딩 [People’s Life Insurance Bldg.]의 1010호로 옮겼다. 李承晩은 새 구미위원부 사무실에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Hawaii를 떠나온 것은 소송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는 동포사회의 분규에서 벗어나서 만주사변[9·18 전쟁] 이후의 극동사태를 논의할 국제연맹 회의에 참석하라는 동지들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으나, 막상 Washington에 도착하고 보니까 그전에 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워싱턴에는 尹致暎이 歐美委員部를 지키고 있었다.
李承晩은 워싱턴에 도착한 지 열흘 뒤인 1931년 12월16일에 美 국무부를 방문하여 스팀슨 (Henry L. Stimson) 장관에게 보내는 석 장의 긴 편지를 전했다. 이 편지에서 李承晩은 먼저 국내의 2,000만, 시베리아의 200만, 만주의 60만, 하와이의 7,000, 미국본토와 쿠바의 4,500명 동포를 대표하여 청원한다고 전제하고,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한 그의 견해와 미국정부에 대한 요망을 피력했다.
이 글에 대해 국무부 극동문제 담당관은 그의 메모에서 [이 편지는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아직 활동하고 있는 증거이며 또 만주사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보여 주고 있어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극동문제 담당관의 이러한 각서로 미루어 李承晩의 편지는 1932년 1월7일에 발표된 스팀슨의 불인정선언 [스팀슨 독트린]의 작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개연성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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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의 목적 : 中國問題 다룰 國際聯盟會議에 참석하기로
리튼(Lytton) 조사단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중국문제를 다룰 임시총회가 소집 되는 등 극동사태에 관한 국제연맹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李承晩은 국제연맹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이기 위하여 유럽과 스위스의 제네바를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2월29일에 東京에 도착하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 毅)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각계 인사들을 만나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3월14일부터 6월28일까지 上海, 南京, 양자강 연안, 北京, 滿洲 각지를 방문하면서 汪精衛 행정원장, 蔣介石 군사위원장 등 중국 각계의 요인들뿐만 아니라 혼조 시게루(本庄 繁) 일본 관동군 사령관, 「만주국」 집정 溥儀(부의) 등 광범위한 인사들을 만났다.
18만 단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리튼보고서 / The Lytton Report」는 먼저 중국이 통일국가의 길을 걷고 있는 점을 논증하고, 만주가 중국의 구성부분이라는 것을 인정 하며, 9월18일의 일본군의 군사행동[만주사변]은 정당 방위라고 볼 수 없으므로, 「만주국」은 승인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
이 「리튼보고서」는 12월6일부터 열리는 국제연맹 총회에서 토의될 예정이 었으므로 李承晩은 이번 국제연맹 총회야 말로 한국의 독립문제에 큰 영향을 줄 중요한 국제회의로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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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獨立機會는 美·日의 충돌에 있어』
李承晩의 국제정세에 대한 생각은 11월11일자로 발표한 그의 「기회를 이용하자」는 글에 잘 표명되어 있다. 그는 한국의 독립기회는 언제나 美_日의 충돌에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광복사업에 절대한 기회는 언제든지 日_美 충돌에 있다. 다른 나라들은 다 강토의 욕심을 가진 고로 그 야심이 일본이나 다름이 없으되, 오직 미국은 동양에서 상권과 도의상 세력을 세우는 것이 더 유력할뿐더러 미국이 필리핀을 찾은 뒤로 손해를 많이 본 고로 민심이 원동(遠東) 에 강토를 점령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하는 고로, 중국과 만주의 강토를 보호하여 타국이 점령치 못하게 하는 것이 연래로 미국의 일정한 遠東政策이다.
곧 우리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덕적 지원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미국의 도덕적 지원을 얻는 것이 다른 나라의 지원을 얻는 것보다 더 유력하다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李承晩은 이어 이제 미국의 친일주의가 변하고 있고, 美_日의 충돌이 날로 증대하게 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지금은 미국의 親日主義가 변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일_러戰爭 때에 미국이 러시아의 세력을 제일 의려[疑慮: 의심하여 염려함]했는 고로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을 후원하여 러시아를 방어하게 하고, 평화시의 중국과 만주독립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을 희생한 것이니, 조선을 일본에 주면 일본은 조그마한 나라이므로 다른 야심이 없어서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미국의 이익이 확장되는 것을 막을 자가 없으리라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광복을 위한 큰 기회가 점점 가까워 온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회를 맞아 우리가 할 급선무는 무엇보다 민족합동이라고 李承晩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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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素昻에게 臨時政府 特使委任狀 요청
李承晩은 이처럼 歐美委員部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으로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임시정부의 특사자격으로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고자 했다. 李承晩은 항주로 피신해 있는 趙素昻에게 임시정부의 위임장을 만들어 보내라는 전보를 여러 차례 쳤다. 李承晩이 친 전보 가운데에는 엉뚱한 곳으로 잘못 배달되었다가 몇 달 뒤에야 항주로 전해진 것도 있었다.
국무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또 반목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위임장에 국무원 다섯 사람이 한자리에서 서명 날인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소앙은 中文으로 위임장을 작성하여 우편으로 국무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서명 날인을 받았다. 그렇게 마련한 위임장은 李承晩의 촉박한 일정을 감안하여 워싱턴으로 보내지 않고 프랑스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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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同胞들이 李承晩의 旅費 거두어
李承晩의 유럽여행 경비도 하와이 동포들이 염출해 주었다. 미국본토에 있는 동포들에게는 [구미위원부]의 활동경비를 지원받고 있었기 때문에 또다시 여행경비 지원을 부탁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李承晩이 떠나온 뒤에 하와이의 [同志会中央理事部]는 安玄卿과 李元淳을 서무대판 으로 선정하여 임시정부에 보낼 인구세 수합과 구미위원부 지원을 위한 의연금 수합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1932년 11월 들어서는 李承晩의 국제연맹회의 참가를 위한 여비를 모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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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가 없는 外交官旅券 발급받아
李承晩은 12월12일에 미국 국무부를 방문하여 혼백 (Stanley K. Hornbeck) 박사를 만났다. 여권발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위스콘신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중국에 건너가 [봉천법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귀국하여 「극동의 현대국제 정치(Contemporary Politics in the Far East)」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던 혼백은 파리강화의회, 워싱턴회의 등에서 「전문가」 또는 경제고문 스태프 등으로 활동했다가 1928년에는 국무부 극동국장이라는 요직에 발탁된 사람이었다. 李承晩은 이때부터 혼백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이게 된다.
미국 국무부로서는 미국시민권이 없는 李承晩에게 여권을 발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李承晩은 14년 전에 대한인 국민회의 대표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 국무부에, 그리고 나중에는 대학 은사인 윌슨(W. Wilson) 대통령에게 여권발급을 간곡하게 부탁했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이 되새겨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무부의 태도가 달랐다. 李承晩에게 여권발급에 관한 의견서를 써내라고 했다. 李承晩은 그대로 하고 돌아왔는데, 이틀 지나서 그 문서가 되돌아왔다. 그런데 문서에는 미국 법무부 장관이 국무부에 李承晩의 여권을 발급해 줄 것을 요망하는 글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서 끝에는 스팀슨 (Henry L. Stimson) 국무장관의 서명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그것이 李承晩의 외교관 여권이 되었다. 일찍이 유례가 없었던 이 특이한 여권을 발급하기 전에 Hombeck은 다른 국무부 스태프들과 함께 상의를 했다고 하는데, 李承晩이 전년 12월16일에 스팀슨에게 보낸 편지가 이들로 하여금 李承晩에게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이 미국정부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했을 것이다.
이 문서는 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 및 그 밖의 나라 공사관과 대사관에도 발송되었다.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서였다. 여러 장의 각국 영사 담당관들의 스탬프가 찍혔다. 프랑스는 이 무렵에 일부 프랑스 여권 소지자들이 미국 이민국으로부터 입국이 거부되고 있었기 때문에 李承晩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李承晩은 프랑스 비자는 유럽에 가서 기차 안에서 받았다. 李承晩은 이 문서 여권으로 여행하는 동안 내내 거의 모든 곳에서 외교관의 예우와 특권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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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드디어 12월23일 영국 리버풀(Liverpool)로 향하는 라코니아 (Laconia)호를 타고 뉴욕 항을 떠났다. 부두에는 많은 친지들이 나와서 전송해 주었다. 쉰여덟의 李承晩은 이제 匹馬單槍 [필마단창: 홀로 한 필의 말을 타고 창 하나를 비껴 든 차림]으로 파동 치는 국제 정치무대에 뛰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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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의 유럽 발자취 – 1933년 [국제연맹]에 호소 차
지금부터 꼭 90년전 1933년1윌4일에 이승만박사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 차 당시의 [국제연맹] 본부 소재지인 제네바에 도착했으며 곧 확동을 시작하였다. 앞으로 그의 유럽 방문지를 현재의 [수학코스]로 여기고, 몇 차례 게재하려고 한다.
A 방문 코스 (Visit Course)
제제바의 체재 및 활동 중에는 파리에 있는 徐嶺海 (Seu Ringhai)가 수행한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영해는 오텔 드 뤼시(Hotel de Russie)에 李承晩이 묵을 방을 예약해 놓고 있었다. 그 방은 [레만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스위트 룸이었다. 그러나 李承晩은 이튿날 작은 방으로 옮겼다. (서영해는 1902년에 부산서 태어났으며, 3·1 운동에 참가한 뒤에 상해로 망명했다가 이듬해에 프랑스로 건너가서 유학하고, 프랑스어로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었다. 그는 1927년 한국통신사(Agence Korea)를 설립하고, 歐美委員部와도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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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 Geneva(제네바) – [국제연맹] (현재 UN)본부 소재지
(c) Wikipedia Picture – 국제 및 유엔 도시 제네바의 아름답고 멋진 풍경
유엔의 전신에 해당되는 기구로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이 있었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0년에 창설이 되었으며, 제네바를 본부 소재지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을 위한 주요 인물로 미국의 28대 대통령 윌슨 (Th. Woodrow Wilson, 1856-1924)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연맹] 창설에 공이 컸는데, 이 연맹의 상설 사무소재지를 결정하는데 아래의 제안을 해서 통과 되었다고 한다. 즉 16세기의 제네바에 활동한 칼방 (Jean Calvin, 1509-1564)의 종교 개혁정신, 18세기 제네바에 나서 활약한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철학과 교육 정신 그리고 19세기에 역시 제네바에서 나서 활약한 듀낭 (Henri Dunant, 1828-1910)의 박애정신이 깃들어 있는 제네바가 세계평화를 위해 회의를 하는 가장 적격한 분위기를 가진 도시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제네바는1815년의 빈 회의에서 스위스에 편입된 “영세중립국”에 속해 있었던 것도 유리한 조건이 이었다.
UN는 [United Nations(국제연합)]의약자이며일명 [국련]이라고도부르고있다. 회원국이되려면규정된의무를수락, 의사와능력을구비한평화애호국가라는여건을갖추어야한다. 1945년10월24일에 51개국으로창설하였으며, 현재, 가입국은 192국이다. 유엔의주요 6개조직은유엔총회,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유엔경제사회이사회, 유엔신탁통치이사회그리고유엔사무국이있다. 2007년1월1일부터반기문유엔사무총장이 5년간유엔의수장으로활동하게된다. 현재유엔의본부는미국뉴욕에있으며, 스위스의제네바, 오스트리아의비엔나그리고케냐의나이로비에지부를갖고있다.
©GenevaTourism-제네바유엔사무소의본부건물 [Palais des Nations]의풍경
현재의 사무소 본부 건물인 [Palais des Nations]은 1929-1936년간, 7년의 시간이 걸려 건축 되였으며 대단한 크기의 건물이다. 국제연맹은 1945년 유엔으로 대체됨으로 이 건물도 [유엔의 유럽 사무소]로 변모되었다. 경제 사회문제, 인권문제, 분쟁 해결을 위해 1년에 8’000 이상의 크고 적은 회의가 개최되고 있으며, 구역 내에는 구관과 신관이 있다. / www.unog.ch & www.un.org
방문: 일반인의견학은 4월부터 10월까지 매일, 이외에는월-금요일에가능하며, 입장시간은 10시-12시 그리고 14시-16시이다. 7월과 8월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다. 입장료는 홈페이지 참조.
약 1시간이소요되며안전상중간에소속팀에서이탈할수없다.
제네바에는여러주요유엔기구들이있으며, 큰유엔기구를열거하면다음과같다.
지역기구로유럽경제위원회 (UNECE = Economic Commission for Europe, www.unece.org
전문기구로
1) 국제노동기구 (ILO = International Labour Office, www.ilo.org),
2) 국제전화통신연합 (ITU = 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www.itu.int),
3) 세계보건기구 (WHO = World Health Organization, www.who.int),
4) 세계지적소유권기구 (WIPO = World Intellectual Property Organization, www.wipo.int),
5) 세계기상기구 (WMO =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www.wmo.ch)가있다.
기타기구로세계무역기구 (WTO = World Trade Organization, www.wto.org)
국제무역센터 (ITC = International Trade Center, www.intracen.org)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UNHCR = UN High Commissioner for Refugees, www.unhcr.org), 유엔무역개발회의 (UNCTAD = UN Conference of Trade and Development, www.unctad.org)
유엔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 (Office of the UN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www.ohchr.org) 등이있다.
제네바에는 유엔기구들 외에 [비정부기구, NGO’s]등 200개 이상의 국제기구들의 본부사무소가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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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1월29일은 일요일이었다. 李承晩은 서영해와 제네바의 베드로 성당을 둘러보고 오후에 그와 함께 기차로 로잔으로 갔다. Maryland에서 와서 [Lausanne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메리암(Anne W. Meriam)양을 보러 간 것이었다. 그들은 긴 호숫가 길과 로잔(Lausanne)에 인접한 우시(Ouchy)의 공원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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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Lausanne(로잔) – 다양한 교육도시 및 올림픽의 수도
©LausanneTourisme-로잔의 아름다운 지역 우쉬 (Ouchy)의 호반 풍경
로잔은 인구125’000명을 갖는 스위스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고, 보(Vaud) 주의 수도이다. 국제 스포츠 도시 이외에 스위스 대법원이 있으며, 교육도시로 연방공과대학교와 로잔 주립대학교, 전문 대학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잔 호텔전문학교, 경영 석사과정으로 또한 유명한 IMD 등의 학교가 있다.
로잔은 이 레만호지역의 관광 중심지이다. 명소로 대성당(13세기에 건조된 스위스 굴지의 고딕건축 걸작품)과 샹 프랑스와 교회 또 올림픽박물관을 위시해서 여러 박물관이 있다. 호반에 아름다운 우쉬 (Ouchy)지역이 있다. 또한 로잔의 가까운 주위에 관광의 매력 들이 많다.
관광 명소
– Musee historique de Lausanne: 11-15세기까지 주교관이 이었던 유서 깊은 건물에 도시의 역사에 관하는 판도와 회화 등을 충실히 수집한 것이 전시
– Musee romain: 로마시대의 거주 흔적에서 만든 박물관. 로잔에서 발굴된 로마의 유적이 많이 전시
– Musée de l’Elysee: 19-20세기의 유명한 사진작가의 오리지날 인쇄 10만점 이상
수집한 것을 자랑함. 넓은 정원에 둘러싸인 18세기의 저택에 전시되고 있음.
– Collection de l’art brut: [생의 예술]을 제창한 트리피어 (J. Tripier)가 모은 수집품 중심. 정신병환자와 수인들에서 나온 창조적인 작품이 병행.
– Fondation de l’Hermitage: 19세기에 건립된 아름다운 저택에 19-20세기의 그림을 중심 한 기획전을 개최.
– Lausanne Transport Card / 호텔에 체크인하면 발부되는 숙박 카드로 체류 기간 시내 공공교통 무료 이용 및 다른 일부 혜택을 받는 편리한 카드가 실시되고 있다.
Lausanne Tourisme & Convention B. / www.lausanne-tourisme.ch
Information Office는 로잔 중앙역 내와 우쉬(Ouchy)의 메트로 정거장 앞쪽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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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ympic Capital (올림픽수도)
스위스 로잔에는 1915년이래 [국제올림픽위원회]의 본부와 그 후위 [올림픽박물관]이 소재해서 [올림픽 수도]라고 불리고 있다. 더욱이 작년에 위의 양 기관의 건물 사이에 [국제스포츠연맹의 집]이 개관되면서 국제스포츠 업무에 더 편리하게 되었다. 그래서 올림픽에 관계되는 또는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국제올림픽위원회)은 1894년에 파리에서 창설되었으며, 1915년에 그 본부를 중립국인 스위스의 로잔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로잔에서는 IOC와 연관된 많은 국제 스포츠 기구들이 이 곳으로 옮기고 또 창립되었다. / www.olympic.org
국제 스포츠의 집 (House of International Sports)
로잔에는 IOC본부 외에 많은 국제스포츠의 연맹사무국이 소재하고 있으며, 시내의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로잔 시에서 땅을 무료로 제공하고 IOC와 로잔 시 그리고 보 (Vaud) 주가 합작투자 하여 3동의 건물을 한 장소(Avenue de Rhodanie 54)에 지었다. 여기에 들어와 있는 기구로는 IOC의 주요 부서와 여러 국제 스포츠 연맹 그리고 기타 국제 스포츠 기관들이다. 명실 상부한 [국제스포츠의 집]으로 편리하고 능률을 올리는 건물이다. / www.olympiccapital.ch/en/organisation/house.php
IOC의텔레바와마킷팅회사, 재정및운영부, 의료와과학부, 국제협력과발전부
AIPS = Int’l Sports Press Ass. (국제스포츠 프레스협회)
ASOIF = Ass. of Summer Olympic Int’l Federations / www.asoif.com
WTF = World Taekwondo Federation (세계태권도연맹) / www.wtf.org
이 외의 다른 여러 국제스포츠 연맹들의 본부들도 이곳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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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박물관 (Olympic Museum) : 세계에서 유일한 올림픽에 관하는 귀중한 자료를 다각적으로 소개하는 박물관이다. 1993년에 개관이 되었다. 여기에는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올림픽의 순간이 언제나 방문자의 눈 앞에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자료가 갖추어져 있다. 귀중한 영상과 자료가 모인 상설전시에 더해서 그림의 기획전도 많이 개최되고 있다. 알프스와 레만 호가 한 눈에 보이는 테라스도 자랑의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올림픽 박물관이다. 박물관에 속한 [도서관]은 옆에 위치하는 별도 건물 안에 있다. 주소: Quai d’Ouchy 1, CH-1001 Lausanne 개관 시간: 매일 9시-18시 (매주 월요일 및 1월1일과 12월25일 휴관) / www.olympic.org/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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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월9일에는 아침 일찍 로잔으로 가서 메리엄 양과, 브라운 부인과 그녀의 아들과 함께 몽트뢰(Montreux)를 구경했다. Montreax(몽트뢰)는 李承晩이 지금까지 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웠다. 그곳에는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이 그의 유명한 [시욘성의 수인](The Prisoner of Chillon)」이라는 시를 썼던 시욘성 (Chatteau de Chillo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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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3 Montreux (몽트뢰) – 관광 및 휴양 도시
(c) Wikipedia Pic. – 레만호의 아름다운 관광 및 휴양 도시 Montreux의 풍경
몽트뢰(Montreux)는 알프스 산 기슭의 제네바 호수 해안선에 있는 스위스 지방 자치 단체마을이다. 인구는 약 2만7천명을 가진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이다.
이 시는 2006 년 8 월 31 일에 해산 될 때까지 브베(Vevey) 지구의 일부였으나 몽트뢰는 [리비에라-페이-덴 호트]의 새로운 지구의 일부가 되었다. 1962 년에 두 개의 지방 자치 단체가 합병하여 형성되었다.
보 지방의 리비에라 (Riviera)라는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몽트뢰는 온화한 기후로 인해 19 세기부터 중요한 관광지였다. 18세기 후반부터19세기의 영국 귀족들사이에 유행이었던 스위스 여행은 만일 제네바에 간다면, [몽트뢰]라는 코스는 꼭 들어가는 일반적이었다. 이 지역에는 제네바 호수 기슭 근처의 수많은 벨 에포크(황금시대) 양식의 궁성과 호텔이 있다. 몽트뢰 기차역은 심플론 (Simplon Railway) 철도의 정류장이며 산악 철도의 중심지이다. 매년 개최되는 Jassfestival은 가장 주요한 행사이다. / www.montreuxriviera.c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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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Wikipedia Pic. – 다 목적으로 사용된 몽트뢰의 Chillon성의 아름다운 모습
시욘성 (Chatteau de Chillon)은 9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알프스 오는 동방 상인들에게 통행세, 물품세를 증수하기 위한 관소로 만들어져 13세기까지의 사이에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 호수에 돌출한 암장 위에 세워져서 멀리서 보면 호수 위에 떠있는 것 같이 보인다. 16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된 시기에 따라 다른 용도로 사용된 성이었다. 유명한 것은 캐토릭 신자였던 프랑스의 사보이 공작이 지금의 스위스의 프랑스어권을 지배하였을 때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프랑스와 보니파 (Francois Bonivard)가 여기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가 바이런 (George G. Byron) 경의 시에 나오는 [시용성의 죄수] 였다. / www.chillon.ch & https://en.wikipedia.org/wiki/Chillon_Castle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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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방문지 (2) – 취리히 / 이승만의 유럽 방문지 (2) – 취리히 (eurasiatour.info)
유럽방문지(3) – 비엔나 / 이승만의 유럽 방문지 (3) – 비엔나 (eurasiatour.info)
유럽방문지(4) – 파 리 / 유럽방문지(5) – 모스크바 / 유럽방문지(6) – 이탈리아 /
유럽방문지(7) – 남프랑스 (미국을 가기 위한 승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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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일부 출처] 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 . .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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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zsong@bluewin.ch / www.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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