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edrich II (프리드리히 2세) – 다방 면에 업적을 남김
프리드리히 2세 (1712~1786)은 18세기의 독일 연방국가의 하나인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 (즉위 1740년5월31일 ~1786년8월17일)이다. 작은 체구였지만 큰 용기와 대담성을 가졌으며 프로이센 역사의 대업적을 남겼다. 전형적인 계몽 전제군주로서 군림했으며, 군사전략가, 교육개혁자, 음악가로 여러 분야에 재능을 가진 왕이었다. 즉 우수한 군사적 재능과 합리적인 국가경영으로 프로이센의 강대화에 노력하였으며 계몽 전제군주의 전형이 되었다.
또한 플루트 연주를 시작으로 예술적 재능을 가진 군주이며 로코코적인 궁정인으로 만능을 발휘했다. 학문과 예술에 밝아서 철학자 볼테르 (Voltaire)와 친밀한 교제를 하였으며 또한 책을 저술하여 철인 왕으로 불리었고 공적을 칭해서 [프리드리히 대왕 / Friedrich der Grosse]이라 존칭되고 있다. 독일에 감사 재배를 도입하여 보급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프로이센 왕 이외의 이력으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뇌샤텔 (현제 스위스령)의 대공 등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의 수도인 베를린에 유명한 건축물을 세우게 했다. 즉 현재에 남아있는 것으로 베를린 국립 오페라좌, 왕립 도서관 (현재 베를린국립도서관), 헨리 왕자 궁전 (현 흠볼트 대학). 또한 그가 좋아하는 포츠담에 지은 여름 별궁 [산수시/Sanssouci (불어로 뜻은 „걱정 없이“)]이다. www.spsg.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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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시절
[프리드리히 2세]는 1712년1월24일에 프리드리히 빌헤름 1세 (Friedrich Wilhelm I, 1688 ~ 1740)와 왕비 조비 도로테아 (Sophie Dorothea)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나다. 아버지는 [군인의 왕]으로, 어머니는 후에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 조지 1세의 딸로 세련된 궁정인이었다. 그러므로 교육방침도 정반대의 2인 대립, 이것은 왕자 프리드리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의 군대식 교육에 적합하지 않아 큰 고통을 당했으며 심지어 도주까지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감금까지 당했다.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733년6월12일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Braunschweig-Bevern공 페르디난트 알베르크 2세의 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ristine, 1715-1797)와 결혼하였다. 이 후 적극적인 군복무와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Rheinsberg (www.rheinsberg.de) 궁성에서 학자와 예술가들과 사귀고 „반 마카아벨 / Antimachiabell“ (1739)을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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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위기간 (1740 ~ 1786)
즉위 초기에 개혁정책으로 악습 즉 고문 등 폐지, 학문 부흥 사업과 저술 활동을 하였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가담했으며 슬레시엔 (Schlesien)을 확보했다.
프로이센은 영국과 동맹하여 오스트리아, 러시아 및 프랑스의 동맹국들에 도전하여 1756에 작센을 침공함으로 [7년 전쟁 (1756-1763)]이 발발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직접 사령관으로 혁혁한 승리를 하였으나 후에 치명적인 패배도 맞이했다. 큰 어려움도 겼었다.
1763년 1월5일에 러시아의 엘리자베트 여제의 급사로 다행히 프리드리히의 열열한 숭배자 Peter 3세가 제위에 오르자 적대행위가 중단되고 강화가 설립되었으며 심지어 만8천명의 병력까지 지원을 받았다. 1763년2월10일에는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하여 [서 프로이센]과 Ermland를 확보했다. 계속 경제를 발전 시키고 군대를 강화하여 24만 명까지 확보하여 방위태세를 갖추었다. 후에 독일은 각 왕국과 공국 (공작이 다스리는 나라)으로 분할된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서서히 확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300여 개의 독일 내 소 왕국과 공국을 정복하여 통일을 달성한다.
평화를 얻은 후에 그는 다시 포츠담 교외에 지은 여름 별궁인 상수시(Sanssouci) 궁전에 기거하며 안락한 생활을 만끽했다. 왕은 바쁜 정무 중에도 시간을 내어 서신 왕래, 플루트 연주 및 저술을 즐기면서 즉 [7년 전쟁사] (원래는 우리시대의 역사)를 저술했다. 만년에 프리드리히 2세는 점차 고독한 인간으로 사람들을 멀리했다. 누나 빌헤미네 (Wihlhemine) 왕녀와 d’Argens 후작 등 친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애견으로만 위로를 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86년8월17일 상수시 궁전에서 노쇠한 몸으로 급사했다. 유체는 유언에 반해서 근위교회에 매장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각 지를 전전하다 독일 통일 후의 1991년에 생전의 원대로 상수시 궁전 앞 정원에 애견과 함께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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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 Pic. – 상수시 궁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Musician (음악가)
프리드리히 2세는 음악에 소질이 있었으며 플루트 연주자로 유명하며 100편 이상의 소나타, 4편의 심포니를 작곡했다. 또한 제2차 슐레시아 전쟁 시에 호헨프리드베르크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서 행진곡 „Hohenfriedberger Marsch“를 작곡했다. 궁정에는 당시의 일급의 음악가 들 즉
크반츠 (Johann Joachim Quqntz), 그라운 (Carl Heinrich Graun), 벤다 (Franz Benda), 바흐의 아들 (C.P.F. Bach) 등이 활약하게 했다. 1747년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아들의 주선으로 상수시 궁을 방문하였을 때 프리드리히 왕과 즉흥 연주를 한 후에 [음악헌정 (Musikalisches Opfer)]를 작곡하여 헌정한 것이 유명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언어에도 소질과 취미가 있어 여러 외국어를 공부하여서 모국어인 독어 외에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라틴어,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까지 해득을 했다. 또한 부왕이 중단시켰던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를 [Berlin Academy]로 개칭해서 진흥시켰다.
(자료 출처: Google/Wikipedi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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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Song Ziyul) / zsong@bluewin.ch / www.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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