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지역 한인사회초창기의 발전에 대해서
1945년에 해방 그리고 1948년에 대한민국 수립 이후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하고 50년대에 온 분이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말에 한인 사회가 시작하게 된다. 즉 지금부터 50년 전인1968년11월12일에 한국에서 처음 간호사 12명이 취리히 공항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12월 말에 망년회의 모임으로 16명이 모인 것이 단체로 처음인 것으로 여긴다.
본인은 이들 보다 1주일 전에 취리히로 즉 1968년11월7일 독일의 몇 대학교 (Koeln, Bochum 및 Frankfurt/M.)를 거처 취리히에 정식 대학생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스위스와의 인연은 1966년 여름에 제네바에 소재한 미국의 국제친선 재단에서 주선한 [재 유럽 한일(韓日) 유학생들]을 위한 학술연구회의 모임에 초청 되여 참가된 일이 처음이다. 이는 오래 끌던 [한일국교정상화]가 1965년에 된 후에 한 미국의 자선재단에서 지리적으로 이웃이고 오랜 동안 역사관계를 가진 한국과 일본의 문제를 토론 상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을 인식하고 마련하여 준 모임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수학하는 한국과 일본에서 온 유학생들을 각각 12명씩을 초청하여 1주간 제네바에서 모임을 갖게 해주었다. 본인은 1964년2월에 유학 차 서독에 와서,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는데 운이 좋게 이 좋은 모임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테신 주의 브리사고 호반에서 가진 [유럽 IVF 여름수양회]의 참가로 추진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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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1월 12일에 한국에서 간호사 12명이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한국에서 간호학 교육을 받고 간호사 자격증을 소지한 자로 한국병원에서 2년 이상 근무한 정식 간호사들이었다. 이들은 스위스의 병원에 취업 차 단체로 온 최초의 팀이며 주로 취리히 주립대학 병원에 근무하며 거주하게 되었다.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이들 중에 5명은 취리히 대학병원 (백몽자, 이한경, 정정현, 정옥자, 정영희), 취리히 시내 Waidspital 병원 (여화자, 정경희), 취리히 호수 가의 맨네도르프 (김미라, 이신자), 딴 주로 베른 대학병원 즉 Inselspital (이덕선 및 강정희) 그리고 리스탈의 칸톤병원 (김명옥), 여기에 수속에 차질로 몇 달 늦게 온 이춘회 간호사이었다.
1968년말 취리히 호반의 Maennedorf에서 가진 망년회 모임 사진 (앞줄 왼편에서, 김미라 간호사, 3번째 주선한 기관의 책임자, 둘쩨줄 두번째 정경희 및 6 이한경간호사, 뒷줄 첫번째 본인, 5번째 백몽자 간호사, 이사의 5사람은 계속 체류함)
1968년12월말에 모두 멘네도르프에 전원 모두 12명과 스위스 주선 기관의 책임자 병원 측의 책임자 한 분, 본인 그리고 독일의 유학생 (이인웅)이 합 16명이 참가하여 모여 망년회를 가졌다. 이 모임이 취리히에 한인들이 10명 이상 모여 망년회 모임을 가진 것이 처음으로 여긴다.
그들은 3년 계약의 근무를 잘 마치고 일부는 귀국 또는 미국이나 카나다로 이주를 하였다. 스위스에 남아서 계속 체류한 분들은 결혼하여 다른 분야에서 활동을 하였다 계속 거주하는 김미라 여사, 백몽자 여사, 정경희 여사 그리고 화랑을 운영하는 이한경 화가이다.
이들 간호사와 본인이 연관된 것은 독일 대학교 (Bochum의 Ruhr/루어대학교와 프랑크푸르트의 Goethe/괴테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스위스 주선 기관 즉 [Schweiz. Vermittlungstelle fuer auslaendisches Pflegepersonal]과 2년 이상 교섭하여 오게 된 것이다. 본인은 한국에서 개신교의 신자로 국제 대학생 선교기구 (IVF = Intervasity Christian Fellowship)의 활동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위의 기관에 연관된 취리히대학교의 여대생 뮐러(Charlotte Mueller)양의 중간에서 연결시켜 준 수고를 많이 한 덕분이다.
이런 구상을 한 것은 1964년2월에 독일 쾰른대학교에 유학 차 올 때 이용한 전세 비행편이 캐토릭 교회의 장화자 수녀님이 주선하여 2차로 오는 백 여명의 한국 젊은 여성들과 함께 오게 되면서 힌트를 얻어서 쾰른의 신교회 사회 봉사부에 관련된 분과 교섭하여 1966년7월에 한국에서 26명의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독일 빌레펠트(Bielefeld)의 베틀의 복지기관에 [Gemeinde Schwester] 간호교육 차 오는 일을 마련하였다. 이 것이 계기가 되여 스위스에 오는 간호사들을 위한 일이 추진되었다. 이들을 돕기 위해서 본인은 1주 전인 1968년11월7일에 왔다. 다행히 취리히대학교 정식학생으로 허락을 받았다
이 무렵에 취리히 시(市)과 근교에 체류하는 한국인은 몇 사람이 돼지 않았다. 열거하여 보면, 시계 점에 근무한 오달순 여사(작고), 취리히대학교에 연수 차 와있었던 이상일 부교수 부부, 치과병원에 연수 차 와있었던 손성희의사, 취리히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이 유리안나 간호사, 김혜숙 무용가 그리고 근교 Urdorf에 국제 결혼을 한 이명숙 (전전 스위스 한인 연합회 회장) 씨 등으로 10명 미만이었다.
이 후 독일에서 간호 교육을 받고 온 송순자 및 박숙회 간호사가 Zollikerberg의 병원에 오게 되었다. 그래서 1969년부터 회칙은 마련되지 않았으나 회장에 송지열, 부회장에 백몽자 간호사로 몇 년간 연말에 망년회 모임을 가졌다. 1971년의 Zollikerberg 병원 기숙사에서 가진 망년회에는 당시의 [주 스위스 대한민국] 강문봉 대사님이 참석하셨다. 주 스위스 대사들의 활동 기간에 대한 기사 참조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switzerland/other/313
그 후에 본인의 바로 후임 회장으로 수고한 분들은 오수철 치과의사, 연수 차로 와 있었던 김창수씨도 기억이 난다. 초창기에는 후임 회장이 나올 때까지 여러 해 동안 회장으로 수고 했다.
스위스한인연합회가 발간한 [메아리]지의 37호의 10페이지에 언급된 [취리히지역 한인회]의 하단에 언급한 [역대 회장 명]에 1978년도부터만 언급이 되고 있는데 약 10년 전에 이미 활동이 있었음을 보충한다. 회칙이 마련된 것은 본인이 두 번째 회장직을 할 때 즉 1982년2월에 가진 총회 때에 초안이 통과되었다.
또한 독일에서 근무 계약을 마치고 스위스로 온 사람들 중에 취리히와 근처에 온 직장인 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동부 스위스 [트로겐(Trogen)의 아동촌]을 거친 한인들이 대학교에 진학과 직장을 얻어서 스위스 최대 도시인 취리히로 옮겨서 또한 한인 사회가 커져갔다.
한국에 파견되어 근무한 스위스 남성들이 한국에서 결혼하여 스위스로 취리히와 근처로 옮겨온 한국여성들 또한 3국에서 국제 결혼을 하여 온 사람들로 늘어났다.
취리히 대학교, 스위스연방공과대학 (ETH) 그리고 여러 스위스 호텔전문학교 및 기관에 연수 차 온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고 학업 후에 정착을 한 한인들도 점차 있게 되었다.
한국기관으로는 1972년에 코트라(Kotra)가 제일 먼저 진출하였으며 초대소장으로 이만득 관장이었다. 현재의 이두영 관장은 17대 관장으로 수고 중이다. 활동분야에 대한 것은 홈페이지를 접하면 된다. / www.kotr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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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pedia – [KoreanAir]의 급성장한 상징인 점보기 B474의 장대한 모습
두 번째의 기관이 대한항공(Korean Air) 로 1976년에 취리히 취항하게 되었으며 유럽에서 파리 다음으로 두 번째이다. 이를 계기로 취리히 지점에 초대로 이윤석 지점장과 3명의 한인 직원 그리고 공항소장 (초대 소장 노승재)의 가족 들고 제2의 취리히에 한인 사회가 커져갔다. 취항 40주년을 기념해서 올린 본인이 운영하는 온라인 잡지의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asia/387 (2016년5월1일 게재)
다음이 금융/은행계통으로 외환은행이 취리히에 사무소가 마련되고 초대 지점장에 박채훈씨가 부임했다. 그 후에 산업은행 지점 (초대지점장 이종각씨) 그리고 대우 증권을 위시해서 여러 증권 회사들이 취리히에 사무실을 갖게 되여 또한 한인 사회가 커졌다. 유감스럽게도 금융기관은 1998년 소위 [IMF 외관위기]를 맞아 모두 철수했다.
한인이 만든 처음 자영 회사로는 1977년12월27일자 “주식회사로 상업등기소에 등록을 마친 것은 [Song Travel & Trade Ltd.]이었다. 회사 대표로 송지열 이외의 몇 명의 직원과 견습생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후에 관광에 연관된 업체들이 만들어져 사업 활동을 함으로 한인 사회가 또한 늘어났다.
이상으로 메아리지에 언급한 1978년 전에도 한인들의 진출과 초창기 한인회 (회칙이 없는 시대에)가 이미 있었음을 추가했으며 현재는 큰 발전으로 취리히와 근교에 1‘000여명이 넘는 한인들과 피를 같이한 한인/스위스 인이 거주하며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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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스위스에서 활동한 인물
이관용 : 취리히대학교에 수학을 하기 위해 1945년 해방 전에 유학 차 와서 체류한 사람이 몇 있다. 현재 파악된 자료에 의하면 1917년에 런던에서 이곳 취리히로 옮겨서 취리히 대학교에서 유학을 한 이관용 박사는 한인으로 유럽에서 가장 먼저 1921년에 박사학위를 한 분이다. 그는 이 후에 귀국하여 여러 면에서 활동했다. 더 자세한 것 / 이관용 (K. Y. Lee) – 유럽 최초박사 (eurasiatour.info)
www.eurasiatour.info/index.php/switzerland/321
두 번째로 이한호 1925년에 취리히에 와서 취리히대학교에서 수학하여 1936년에 석사과정에 해당되는 [Lizentiat]를 받았으며 스위스엑 계속 체류하였다. 스위스에 국제 스포츠 [유도]르 도입 보급하여 [스위스유도협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서독 초대 총영사로 임명이 되었다. 더 자세한 것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switzerland/other/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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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리히 여성합창단 – 2013년 국제교류 공연 ©SongZiyul – 왼편 흰 옷의 단원 [프랑크푸르트 한인합창단]와 한복 [스위스한인여성합창단] (앞의 분들) 양편 배영한 스위스 대사 부부, 신현아 중앙 김현정 반주자, 김영식 및 우순기 지휘자
한국-스위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크푸르트 한인합창단]과 협연
시간: 2013년 4월 13일 19시 // 장소: Evangelisch-Reformierte Kirche Albisrieden
[스위스 한인 여성합창단]
1999년12월에 창단 되었으며 현재 단원이 31명 (2011년12월)으로 매년 한번씩 정기 공연이 있으며 이 외에 다양한 초청공연을 하고 있다. 현재 합창단은 조미애 단장과 임원과 단원들 그리고 우순기 지휘자와 신형아 반주자가 수고하고 있다.
스위스 한인 여성합창단 홈페이지 / www.koreafrauenchor.ch
우순기 (Soon-Kee Woo) 지휘자
취리히 음대에서 Lehrerdiplom과 Konzertdiplom 성악과정 수석 졸업. Luzern 음대 Solistendiplom 과정 재학 중 Stadttheater Luzern에서 오페라 솔로 가수로 활동. Kantonschule Glattal에서 성악 선생으로 강의 중이다.
신현아 (Hyun-Ah Rottenschweiler-Shin) 반주자
서울 예고 재학 중 도독. Detmold 및 Düsseldorf 음대 수학, Zürich 음대 졸업. 현재 피아노 교사, 합창 반주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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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한인합창단]
[프랑크푸르트한인합창단]은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합창단이며 아마추어에서 전문합창단으로 발전한 합창단으로 독일과 한국의 여러 도시 특히 청와대에서 공연을 가진 유명한 한인 합창단이다.
김영식 (Young-Shik Kim) 지휘자
서울음대 성악과, 베를린 국립음대 성악과 졸업. Oper Frankfurt 정 단원, 프랑크푸르트 한인합창단 지휘자, 한국 및 독일에서 오페라에 테너 주역 출연. 한국 및 유럽, 북미지역에서 1000여 회 콘써트 독창 자 출연, 자작곡 창작 가곡집 3권 및 성가독창곡 CD 출판.
김현정 (Hyun-Jung Kim) 반주자
프랑크푸르트 음대 피아노과 졸업. Darmstadt 음대 Kammermusik 학과 졸업. [다름슈타트 테아테 발레 피아노 반주. 2012년 반주상 수상. 2013년 [Pianohaus in Wiesbaden] 연주. 현재 프한합 반주자, 독일합창단 반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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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Ziyul – 박물관 [Rietberg Museum] 건물 앞에서 [프한합]의 단원 일부
다음 날 [푸랑크푸르트 합창단]의 일행은 취리히를 방문한 기회에 취리히 관광을 하고 돌아갈 계획이 있었다. 마침 본인 아는 대학 동문의 부인이 단원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을 뜻밖에 알게 되였고 또 관광의 안내를 부탁 받아서 취리히의 주요한 곳들을 안내하여 설명하여 주었다. 본인은 1967년 10월에서 1968년 10월말까지 1년간 프랑크푸르트에 체류하였으며 이 기간에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2학기를 수강하였던 일에 있어서 일행들의 안내가 더욱 기쁘게 여겼다.
일행은 9시30분에 숙소에서 출발하여 취리히 관광의 중심지 Muensterplatz에서 Gross-muenster와 Fraumuensterkirche, Lindenhof 언덕에서 취리히 대학교와 연방공대, 금년은 [봐그너 해]로 독일의 대 음악가 봐그너 (Richard Wagner, 1813-1883)의 취리히 체류 기간 (1849-1858)에 연관이 있는 Rietberg Museum (www.rietberg.ch / 전 Villa Wesendonck)을 방문하였다. 마침 한국인 직원이 근무하고 있어서 전시장의 일부를 잘 돌아 보았으며, 부설된 레스토랑과 뜰에서 휴식과 간단한 점심을 편리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코스로 취리히 시의 중심 부분과 호수 및 설경을 잘 전망할 수 있는 Waldspital 위의 언덕에서 취리히 시와 주위의 경치를 즐겼다. 이로서 스위스 최대의 도시 취리히에 대해서 좀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였으며 또한 운이 좋게 날씨가 좋아서 설경과 호수와 취리히 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기억에 간직하고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게 된 것을 안내자로 매우 기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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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지열 (Ziyul Song) / zsong@bluewin.ch / www.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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